- 2015/01/09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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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간에 묶인 말들은 길게 울었다. 눈을 홉뜨고 콧구멍으로 더운 김을 뿜었다. 말들은 주인들과 오래 더불었다. 오로지 동물만의 느낌으로 말들은 주인들의 불행을 눈치 챘다. 발굽들이 좀체 가만있지 못하였다. 왕의 유순한 가라말도 귀를 세우고 성마른 호흡을 뱉었다. 야들이 왜 이런디야…… 오래 말들을 부려온 늙은 목자는 뻣뻣한 수염을 쓸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보름달이 중천에 걸리면 축생들은 음기가 과히 돋아 지랄병이 걸린 것처럼 날뛰기도 했지만 이날은 초하루였다. 잘라낸 손톱 같은 삭월이 구름 속에서 희미하게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헛 참…… 목자는 속을 메우는 불안증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한 삽 가득 퍼 올린 말똥을 구사 옆의 두엄더미에 보탰다. 노인의 직감은 축생만큼이나 적확한 법이나 필부의 분수로는 하던 업을 이어하는 것밖에 별 다른 터수가 없었다. 삭은 허리뼈로 전해오는 통증에 목자는 삽을 내동댕이치고 아구구, 신음을 토했다. 별들은 먹구름에 가렸고 마포촌에는 밤안개가 자욱했다.
-나는 사슴을 잡으러 왔는데.
모대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볐다. 근자에 왕의 침수에 훼방을 놓는 무례는 받아본 일이 없었다. 십 년 전의 큰 전쟁이 있을 적에 급한 전령이 그랬던 것이 전부였다. 그의 앞에 백가가 서있었다. 칼을 든 채였다. 침대에 앉아 모대는 칼을 쥔 백가를 덤덤히 올려다보았다.
-너는 나를 잡으러 왔구나.
모대의 눈이 백가의 눈을 보았다. 너의 눈이 떨고 있구나. 모대는 엷게 웃었다. 벌써 스무 해도 더 된 일이다. 그때도 그랬다. 스무 해를 통하여 그 버릇은 지독히 살아남았다. 밤중에도 시퍼런 빛을 발하는 백가의 칼을 모대는 애써 외면했다. 그때의 천진한 시절이 좋았어. 그때 우리의 인연은 순박하였다. 권력에 다치고 술수에 얽히는 바가 없었다. 싫으면 울었고 좋으면 웃었다. 속내가 없는 한 겹짜리 인연이었다. 그토록 정직하였거늘. 나는 그때가 그립다. 너도 그럴 터.
그날의 백가도 떨었다. 그러니까 모대와 백가가 처음 눈을 마주한 날이었다. 그들이 왜국에서 자라던 시절이었다. 모대는 고귀한 왕가의 혈맥을 지녔음에도 짓궂은 성정이었고, 백가는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임에도 칼의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빛이 떨렸다. 뼈가 무른 나이치고는 장사 셈평에 밝던 백가는 예하의 상단을 거느리고 왜 장사치들과의 흥정에 맛을 들였다. 그날도 백가는 달구지에 이것저것을 싣고 장도에 올랐다. 백가는 달구지를 몰아 좁은 샛길로 향했다. 번듯한 대로가 있음에도 그리 한 것은 촌각에도 틀어지는 것이 상도임을 백가가 익히 알고 있는 탓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또래를 웃도는 총기를 지닌 백가라지만 굉장한 천둥벌거숭이로 동리에 악명을 떨치던 모대 패거리의 급습을 예상하지는 못하였다. 모대 일당은 일대의 선량한 백성들에게 괘씸한 장난질을 일삼는 것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좌판에 배가 갈라진 채로 늘어선 생선들에 모래를 끼얹어 못 쓰는 물건으로 만든다든지 홀아비로 십 수 해를 견뎌온 불쌍하고 늙은 어부가 밤새 짜놓은 그물을 죄다 망쳐놓는다든지 음전한 숫처녀가 밥을 짓는 가마솥에다 사냥으로 잡은 수노루의 우람한 양물을 감춰놓는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백성들이 모대 일당을 잡아 족치려는 궁리를 한다든가 하다못해 관에다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지 못하는 것은, 모대가 다름 아닌 구다라 대왕의 조카인데다가 구다라 대왕을 대리하여 왜에 체류하는 왕제 곤지의 혈육인 탓이었다. 왕제 곤지는 이 나라의 대왕도 스승으로 떠받드는 당대의 현인이자 항용 백성들의 심신을 살피는 당대의 군자였다. 모대가 제일가는 혈통의 소유자인데다 저들이 떠받드는 왕제 곤지의 소생인 탓으로 백성들은 감히 모대의 흉허물을 잡지 못하고 속병만 앓는 것이었다. 그런 모대가 백가의 달구지를 습격하였다. 모대를 따르는 왜의 코흘리개들은 저들이 구다라 대왕의 근왕병이라도 되는 양 서투르게 깎은 목검을 받쳐 잡고 기세 좋게 돌진했다. 그러던 그들이 아차하며 우뚝 걸음을 멈춘 것은 소달구지의 좌우를 지키고 선 장골들을 보고서였다. 장골들은 코웃음 치며 목검의 앞에 진검을 빼들었다. 본시 출신이 저자의 사나운 잡류배들인 그들이 조무래기 몇몇의 혼을 빼놓는 것은 손쉬웠다. 더불어 구다라의 백씨 일가는 왜왕가에 지물을 독점 납품하는 세 있는 집안이었으므로 관의 눈치를 볼 계제도 아니었다. 애당초 왕제 곤지의 위명으로 겁박하여 주전부리할 감이나 타낼 셈속이었던 조무래기들은 제 목줄을 결딴낼지도 모르는 칼날 앞에서 혼비백산했다. 모대의 유일한 방패막이인 왕제 곤지의 이름 세도 외지 출신의 이들에게는 숫제 헛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왕제 곤지의 소생이다. 모대는 거푸 강변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식은 조소.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은 조무래기들을 구원한 것은 다름 아닌 백가였다. 잘 벼려 퍼런빛을 발하는 칼을 백가의 하얀 손이 막았다. 모대는 그 손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떨리는 눈도 보았다. 이제 우리가 저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빛이 떨리는가. 장골들의 칼날에 목을 움츠리면서도 모대는 그것이 의아했다.
모대는 길게 숨을 쉬었다. 추운 날이므로 뽀얀 김이 숨결과 섞여 나왔다. 백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이 떨릴 뿐이었다. 칼을 쥔 오른손은 유난히 떨림이 심하였다. 모대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롱에 불을 붙였다. 불이 붙자 모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백가의 몸을 덮었다. 백가의 몸이 그의 마음처럼 그늘졌다. 모대도 백가처럼 말하지 않았다. 다만 예의 덤덤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딱하구나, 백가야. 또한 내 신세가 딱하다. 무엇이 우리를 이 지경으로 내몰았느냐. 모대는 속으로 여겼다.
-눈이 많이 오는 바람에 사슴을 놓쳤구나.
백가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모대는 멋쩍게 웃었다. 날이 춥다. 너는 괜찮으냐. 살갑게도 물어봤지만 역시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추울 것인데…… 모대는 스스로 말을 거두었다. 모대의 눈은 백가의 눈을 보았다. 그것에서 복잡한 심사를 읽었고, 그것보다도 복잡하게 얽혀있는 역사를 읽었다. 모대와 백가의 역사. 고난을 해쳐내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하고 얼싸안기도 하고. 이따금은 패배하고 좌절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 모든 것을 같이. 오랜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백가의 눈에서 읽어지는 역사를 모대는 쉬 떨쳐낼 수가 없었다.
-너도 나를 놓칠 수는, 없는지.
모대는 말을 해놓고 가슴이 철렁하였다. 백가의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올지 모른다. 두렵다. 그의 대답을 바로 듣기 어렵다. 그래서 다른 말을 했다.
-그 날의 너도 오늘의 너처럼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백가는 모대 일당을 곱게 돌려보냈다. 장골들이 까만 점으로 소멸할 때까지 멀리 달음박질을 쳐서야 패거리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쉴 수 있었다. 머리통이 굵어보아야 열서넛이 고작인 그들에게는 고약한 경험이었다. 그중의 막내는 얼굴이 허옇게 질려 물똥을 싸질렀다. 코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에도 그의 바로 손위가 심하게 퉁바리를 놓지 못하는 것은 기실 저 또한 오줌을 찔끔 지린 터였다. 모대는 내색 않고 헛기침을 하다가 거처로 돌아가 슬그머니 속곳을 갈아입었다. 유모가 흉을 볼까 한사코 스스로 빨래를 자처하였다. 그걸 보고 유모는 모대가 어른스러워졌다며 한참을 추켜세웠다. 잠자리에 들어서는 저의 목줄을 향해 번뜩이던 칼날을 떠올리며 이불을 이마 끝까지 끌어올렸다. 잠결에 오줌을 지릴까 측간에 들러 단단히 준비를 해두었다.
떠들썩한 앞뜰의 소리에 모대는 잠에서 깼다. 모대의 앞뜰의 소란보다도 더 시끄러운 악을 써서 단잠을 깨운 괘씸한 소란을 진압할 작정이었다. 필시 말대인〔馬大人〕 찬수류가 유모의 풍만한 젖통을 희롱하다 된통 야단을 맞는 일이리라. 그것이 아니라면 말대인이 제공자(諸公子), 그러니까 왕제 곤지의 혈육들을 충돌질하여 갯가로 고기잡이를 나가다가 제공자의 글선생에게 적발 되어 호된 꾸중을 듣는 일이리라. 또 그것이 아니더라도 아무튼 말대인이 연루된 사건이 벌어진 것만큼은 분명하리라, 모대는 여겼다. 찬수류가 말대인이란 별호로 불리게 된 경위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가 곤지의 수하로 말들을 찌우고 길들이는 책무를 수행하는 까닭일 수도 있고, 그가 옛 말한〔馬韓〕의 수다한 소국들 중 하나를 고향으로 삼는 까닭일 수도 있었다. 말 뒤에 대인이란 호칭이 붙는 것은 그가 여타의 평범한 목자들과는 다른 면모가 있는 탓이었다. 사실 대인보다는 기인(奇人)이라 이름이 맞을 것인데, 예를 숭상하는 구다라의 유순한 사람들이 기왕지사 기인보다는 대인이 듣기에 낫다며 말대인을 찬수류의 별호로 삼은 것이었다. 앞서 밝힌 대로 유모를 희롱한다든지 제공자를 충동질하는 것은 물론, 성미에 차지 않는 일이면 제아무리 그의 주인인 곤지라도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피할 길이 없었다. 북 치고 피리 불며 길가를 떠도는 놀이패가 지나가기라도 하는 날엔 그들을 따라나서 날이 으슥해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건달들과의 드잡이에서는 패왕 항우보다도 맹렬했고, 주사청루에서 한바탕 질펀하게 엉키고 한해 꼬박 쌓아둔 목돈을 그날의 해웃값으로 탕진해버리기도 하였다. 그가 기르는 수십 두의 말들에게 저마다 이름을 붙이고 어쩌다 폐사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상복을 입고 밤새도록 곡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대인보다는 기인의 부름이 가당한 것이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수탉이 홰를 치는 아침부터 앞뜰이 소란한 것은 필시 말대인이 벌인 일이리라 모대가 여기는 것도 아주 까닭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대가 살펴보니 말대인도 구경꾼의 주제로 먼발치에서 까치발을 세우고 소란의 까닭을 살피느라 혼이 빠져있었다. 모대도 그와 같이 하였다. 풍경을 살피던 모대의 눈에 힘이 들어간 것은 전날 보았던, 눈빛이 떨리던 백가가 시야에 들어오고서였다. 겨우 삭였던 부끄러운 두려움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놈이 대체 무슨 수작인 게야. 모대의 입속이 말랐다. 불안한 근심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백가에게 무어라 듣던 곤지는 모대의 처소를 향하여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대는 한달음에 곤지의 앞에 대령했다. 곤지의 자비심은 바다처럼 깊으나 한번 노기를 띠면 역시 바다처럼 세차게 휘몰아치는 까닭이었다. 공손히 엎드린 모대의 등 위로 준엄한 곤지의 음성이 쏟아졌다.
-이놈, 성정을 고쳐라 그리 일렀거늘.
애써 분을 삭이는 아비의 음성에 모대는 가만히 떨었다.
-어찌하여 이리도 깨침이 없느냐.
모대는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몸을 웅크리고 있자니 심장의 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백씨의 자제가 아뢰는 말이 틀림없는 사실이렷다.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면 도리어 아비의 화를 돋운다는 것을 모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한즉 모대는 재삼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 아비의 심문에 긍정했다.
-고얀.
곤지는 노기를 말로써 발하는 법이 없었다. 고얀. 아무리 화가 끓어도 그 두 글자로 그쳤다. 그는 아들의 잘못을 단죄할 수단을 잠시 고민하다 결론을 내놓았다.
-너는 오늘부터 달포 간 왕가의 권속이 아니다. 다만 백씨의 사환꾼으로 일하며 네 죗값을 치러라.
-하지만, 아버님!
곤지는 눈을 부라리는 것으로 모대의 반론을 제압했다. 그로부터 달포 간 모대는 백가의 사환꾼으로 살았다. 어깨를 늘이고 백가의 뒤를 따르는 모대를 향해 말대인이 킬킬거렸다.
-슬플 것도, 노할 것도 없어라. 다 크게 쓰일 일이 있겄제요!
-말대인은 말이나 돌봐!
-그럼은요, 그럼은요.
말대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구간으로 돌아갔다.
모대의 시선은 여전히 백가의 눈에 머물렀다. 너는 칼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네 일생을 통하여 관철돼온 명확한 것. 그럼에도, 그 두려움을 견디고서 이렇게까지 한단 말이냐. 모대의 눈두덩에 물기가 차올랐다. 이토록 나의 죄가 크단 말이냐. -내가 너에게 모질었느냐.
모대는 모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기억의 구석구석을 훑어보지만 결국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다시 백가의 눈을 보았다. 거기에 기록된 복잡하고 오랜 역사에서, 모질었던 것이 끼어있는지 찬찬히 살폈다. 그러나 그 시도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백가가 시선을 돌린 까닭이었다. 모대는 이미 거두어진 백가의 시선, 그 잔상을 더듬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 백가야. 나는 너에게 모질지 않았거늘.
모대는 침대에 허망하게 주저앉았다.
-그렇다면 네가 나에게 모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모대는 후회했다. 내가 백가를 책망하였구나. 내가 정녕 그를 책망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내가 그를 이리 만들었거늘 어찌 그를 책망한단 말인가. 이렇게까지 네 아픔이 깊었구나.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이 속에서 치고 올라왔다. 이럴 것까진 없지 않았느냐. 이토록 결딴이 나버릴 우리의 관계였더냐. 어찌 네가 나를 칠 수 있느냐…… 괴로운 생각들이 얽혀 모대의 머릿속을 쏠았다. 모대는 멍한 눈으로 백가를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익숙한 냄새가 끼쳤다. 전장에서도 조정에서도 궁전에서도 저자에서도 곁을 지키던 그 냄새. 그래, 이것이 익숙한 만큼 너는 내 곁에 오래도록 있었구나. 고맙다. 오래도록 있으면서, 나에게 향하던 숱한 환란들을 막아주었다. 현혹하는 사탕발림으로부터, 삿된 술수로부터, 날아드는 창칼과 화살로부터 나를 구하였다. 네가 없이 어찌 내가 있었겠느냐. 네가 나의 첫 스승이었다. 너로부터 내가 변하였다. 그래, 정말로 네가 없이 어찌 내가 있었겠느냐.
-굼벵이 탕을 자셨습니까. 피가 끓는 시절에 어찌 그리도 굼뜨십니까. 백씨의 사환으로서 성실히 종사하라는 왕제 전하의 뜻을 거스르실 작정이신지.
모대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곤두섰다. 누구는 비지땀을 흘리며 짐을 나르는 데 열중이거늘, 누구는 합죽선을 살랑거리며 성실한 역군에게 지청구를 늘어놓는단 말인가. 저 밉살스런 콧잔등을 주먹으로 짓이겨주어야 화가 가실 것이나 그러자면 아비로부터의 혹형을 피할 길이 없으니 모대는 대신 힘없는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일꾼으로서는 영 아니올시다그려. 쯔쯔 혀를 갈기며 뇌까리는 백가가 얄미웠다. 허접스러운 목검에 눈빛이 떨리던 하얀 손목의 소년은 어디로 가버리고 영악한 능구렁이가 도사리고 있는지. 달포만 지나보아라. 반드시 네놈 가문을 불구덩이에 처박고야 말 터이니. 물정 모르는 어린 무지렁이의 철없고 웅대한 각오였다.
백가의 모대 다루는 솜씨가 참으로 영악한 것이, 항시 조롱조로 몰아붙이는 일변도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한참 모대의 약을 바짝 올려놓고 이제 한마디만 더 얹으면 모대가 광포히 굴 참에, 백가는 교묘히 웃는 낯으로 은근히 휴식을 권하는 것이었다. 공자는 이리 와서 좀 쉬시지요. 슬그머니 주전부리도 챙겨주면서. 마지못해 곁에 앉으니 이제 선자까지 부쳐준다. 어주, 이놈 봐라. 모대는 실소를 머금었다.
-내가 공자에게 골탕이나 먹이자고 왕제 전하를 뵌 줄 아십니까.
아니요, 모대의 답은 애초에 들을 생각도 없었다는 듯 백가는 멋대로 자답했다.
-어라하의 신민으로서 왕제 곤지의 위명을 모르는 자 어디 있겠습니까. 일찍부터 어라하를 모시고 이 나라를 이끌어온 전하는 진정으로 나라의 빛이십니다. 그런 왕제 전하의 높으신 함자가 상단의 달구지나 급습하는 어설픈 무뢰한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뭐야?
-왕제 곤지의 소생이라니. 이를 믿어줄까 말까 하다 공자의 관상을 보고 믿기로 하였습니다. 심술이 덕지덕지 끼어있긴 해도 귀인의 상이긴 하더이다.
-뚫린 입이라고.
백가는 모대의 항변을 가뿐히 무시하고 제 할 말을 이었다.
-나는 일단 믿기로 하였습니다. 당신이 왕제 곤지의 소생이라고. 그러니 수가 보이더군요. 일단 공자 일당을 방면해주고, 왕제 전하를 뵈어 낱낱이 사정을 고하리라. 그리하면 반드시 체면을 중시하는 왕제 전하께서는 우리에게 빚을 졌다 여기실 것이다. 이 기회를 잘 살리면 든든한 벗바리를 얻는 수도 생기겠다.
-고얀.
모대는 얼굴을 붉혔다.
-공자의 고얀은 춘부장의 것보다는 위엄이 덜한데요.
백가는 부채를 살살 부쳤다.
-노기를 그토록 드러내지 마십시오. 속을 들키면 적은 다음 수를 더 쉽게 꾀합니다. 그러면 더욱 골탕을 먹는 것이지요.
노기를 그토록 드러내지 마십시오. 백가가 모대에게 최초로 일러준 지혜이자 앞으로 숱하게 쏟아질 진언들의 시초였다.
-너를 만나고 많은 일이 있었다.
모대는 그것들을 씁쓸하게 속으로 갈무리하고 말을 이었다.
-그 많은 일들이, 너는 기꺼웠느냐.
마침내 그의 눈이 물기를 떨어드렸다. 모대는 울면서 백가에게 물었다. 너는, 너는 기꺼웠느냐. 백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대는 다시 물었다.
-너는 기꺼웠느냐.
나는, 백가가 무거운 입을 뗐다.
-나는, 기꺼웠습니다……
모대가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싸쥐었다.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숙인 머리에서 희미하게 음성이 들렸다.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냐, 나도 기꺼웠다……
마구간에 매인 가라말이 뛰쳐나왔다. 갈기가 바짝 곤두섰다. 긴 울음을 토해내며 가라말은 난동을 부렸다. 눈은 발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가라말은 한참을 날뛰었다. 목자는 멍한 눈으로 가라말의 난동을 지켜보았다. 그것을 보는 이들의 대개는 말이 드디어 미쳐버렸다고 하였지만 목자는 다르게 말하였다. 갸륵하다. 목자는 다시 요통을 견디면서 두엄더미를 쌓았다. 슬프게도 맞아떨어져버린 빌어먹을 직감을 탄하면서. 그러다가 두어라, 혼자 중얼거리고는 다시 두엄 쌓는 일에 열중하였다. 전부 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이다. 슬플 것도, 노할 것도 없구먼. 본시 그리 되도록 꾸며진 일이구먼…… 목자는 낮게 중얼댔다. 밤안개가 낮게 깔린 마포촌의 일이었다.
-2-
-주무십니까.
하늬바람을 타고 귓가에 전해오는 목소리에 모대는 눈을 떴다. 모대는 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음에 부정했지만 기실 잠이 들었던 듯도 하였다. 푹신한 동산에 맡긴 몸이 느른하였다. 모대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주무십니까, 살가운 물음이 들려온 방향이었다. 그 물음의 주인을 보고서 모대는 다시 웃었다.
-무엇이 그리 우스우신지요.
모대는 오로지 물음으로 말을 맺는 그 사람에게로 바투 붙었다. 그리고 껴안았다. 좁다란 어깨가 넓은 품안으로 알맞게 들어왔다. 그 알맞음이 모대는 못 견디게 좋았다. 다시 웃음이 배어나왔다. 곱게 짜놓은 명주실 같은 머리칼을 손으로 빗기며 모대는 가만히 정수리에 코를 박았다. 모대의 입 주변에서 웃음기가 가실 줄을 몰랐다. 모대는 물음에 대하여 대답 대신 이름을 불렀다.
-이요.
이어 이요란 이름을 다르게 불렀다.
-부인.
여자는 제 이름을 부르는 것엔 생글 눈웃음을 쳤지만 두 번째 부름에는 마뜩찮은 듯 미간을 좁혔다.
-부인은 아니 됩니다. 구다라의 귀한 혈맥은 오로지 그들끼리 통하여 있는 법.
-이미 너와 나는 통하였는데……
짓궂게 웃으며 하는 말에 이요는 고개를 휙 돌렸다.
-망측하게.
-그리고 또 누가 구다라의 귀한 혈맥이란 거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모대 쪽으로 돌렸다.
-멍청한 질문을 하는 제 앞의 사내가요. 너무나 멍청해서 그 귀한 혈통을 잊어버린 분이죠. 제가 알려드릴게요. 공자께서는 구다라 건길지의 질자이자 존경받는 왕제 곤지 전하의 소생이며……
-저리 치워. 다 무슨 소용이야. 본국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변방의 하고 많은 왕족들 중 하나일 뿐이야.
이요는 저를 끌어안은 모대의 품을 뿌리쳤다. 그녀는 심통이 찬 눈으로 모대를 올려보았다.
-그 말씀은 왕제 전하를 욕보이고 나아가 구다라의 왕통을 능멸하는 거예요.
모대는 볼멘소리로 받아쳤다.
-누가 보면 이요는 구다라의 신민인 줄 알겠어.
그녀는 논쟁에서 밀릴 의사가 전혀 없었다.
-누가 보면 공자는 고구려 사람인 줄 알겠군요.
모대는 대강 손을 내젓는 것으로 논쟁을 매조지려고 했다. 그녀와의 말다툼에서는 항시 이득을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기왕 벌어진 판을 접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날선 목소리가 모대의 귓전으로 날아와 따갑게 박혔다.
-공자께서는 공자의 귀한 혈맥에 책임감을 가지셔야 해요. 그 피가 어떤 핀데. 한수에 이르러 구다라를 창건하신 온조대왕으로부터 내려와, 동정서벌하고 사직을 굳건히 하신 근초고대왕께서 널리 떨치시고 그 후로 누대에 계승되면서도 절대 더럽혀지지 않은 고결한 혈맥이 아니던가요. 그 혈맥을 잇고서도 어떻게 그런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주워섬기실 수 있단 말예요.
-태학박사보다도 구다라 역사에 훤하구먼. 이래서 여인들이 필요 이상으로 깨우치는 걸 경계해야 한다니까.
-말은커녕 방귀 취급도 못해줄 그 소리는 필시 말대인의 천박한 혀끝에서 나왔겠죠?
모대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백가의 상단에서 사환꾼 노릇을 하며 얻은 것은, 비단 자주 결리고 쑤시는 어깨뿐만이 아니었다. 이요라는 여인 역시 사환꾼 노릇을 하는 와중에 얻었다. 그런데 한없이 상냥하고 곰살궂은 이 연인은 이따금 크게 몰아치고 벽력처럼 드세지는 때가 있어 과연 그녀가 자주 결리고 쑤시는 어깨보다 나은 품삯인지는 고민을 해봐야하는 문제였다. 이요가 모대의 여인이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춘정이 한껏 부풀어 오르는 시절의 그들이었으니 어쩌면 그렇게 되도록 지어진 일인지도 몰랐다. 백씨의 몸종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그녀가 가녀린 정수리에 닷새 치의 빨랫감을 이고 빨래터로 향하고 있었다. 근방에 악명 높은 말썽쟁이여도 여인에게만큼은 호의를 베푸는 모대가 그 장면을 보고 무심코 지나치지는 않은 것이었다. 여인에게서 빨랫감을 기어코 받아내는 그 순간에 모대는 소매를 걷어붙인 그녀의 가늘고 흰 손목을 보고 말았다. 더불어 잔뜩 그늘진 그녀의 움푹 팬 쇄골을 보았다. 모대의 눈이 흔들렸다. 이어 미처 여미지 못한 앞섶까지 시선이 이르는 것은 구태여 모대가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자연한 이끌림이었다. 그러다가 여인의 붉은 뺨을 보고 시선을 마주하니 환한 불빛이 타다닥 튀는 것이었다. 이른바 이심전심이었다. 후텁지근한 여름의 공기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타고 흐르는 훤한 목 줄기며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는 환한 입모양을 가진 모대였다. 그것이 또 여인이 보기에 흠 잡을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서로가 꺼리지 않으니 정이 동하고, 또 그러하니 자연스레 몸을 껴안고 만지고 하는 것이었다. 한창 여물어가는 남녀의 몸이었고 서로가 궁금한 더운 피의 시절이었다. 왜국의 법도란 것이 구다라처럼 내외하고 까다롭고 시시콜콜하게 절차를 따지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맞으면 쉬이 동침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풀이 허리춤에만 올라도 사내가 계집을 고꾸라뜨리는 것이 왜의 통념이었다. 그럼에도 왕래가 잦고 개활한 빨래터에서의 일은 나름대로 파격의 축에 들었다. 금세 모대 공자와 몸종 이요의 사연으로 동리가 떠들썩해졌다. 고결한 군자 곤지는 아들의 뜨악한 추문으로 달구어진 얼굴을 가리느라 회초리를 들 짬이 없었다. 모대가 아비의 체면일랑 안중에 두지 않고 오로지 저의 연애에만 열중하는 것은 말대인 찬수류가 그 시절에는 으레 그러는 것이라며 못된 부추김으로 모대의 허파에 바람을 불어넣은 까닭이었다.
백가가 옛날 중국의 이야기를 운운한 것은 그들 사이의 정분이 익을 대로 익은 때의 일이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사환꾼 노릇을 하기로 한 기한이 지난 연후에도 모대는 툴툴거리면서도 백가와 곧잘 어울렸다. 이요의 주인인 백가와 어울리지 않고서는 그녀와 얽힐 수 없는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근묵자흑이라 모대를 따라 못된 버릇이 든 백가는 아무렇지 않게 헛간에서 몰래 주안상을 보고 빼돌린 약주를 홀짝거렸다.
-옛날 전국칠웅이 겨루던 때에 여불위라는 장사치가 있었다죠.
배울 학 자라면 학을 떼는 모대도 백가의 현하구변이자 청산유수로 내닫는 언변에는 귀를 기울였다. 턱을 괸 채 심드렁한 체 하여도 시선은 항시 백가의 쉬지 않는 입가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여불위는 진나라 왕의 수많은 왕자 중 하나인 자초에게 제 재물을 모두 걸었더랍니다. 그러고서는 여기저기에 뇌물을 찔러주고 혀를 잘 놀리며 대단한 수완으로 자초가 진나라 왕의 후사를 잇게 만들었더랍니다. 그 후에 여불위는 재상에 올라 자초의 뒤에서 국정을 좌지우지했지요. 그러다 자초가 얼마 안 가서 죽고 말았는데, 그 뒤를 영정이란 그의 아들이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이 또 기가 막히죠.
-왜?
-여불위가 자초에게 저가 아끼는 어여쁜 몸종을 은밀히 통하게 했는데, 자초와 몸종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 바로 영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여불위가 자초에게 몸종을 내줄 적에 이미 몸종은 아이를 배고 있었던 겁니다.
어느새 모대는 턱을 괴었던 팔을 풀고 상체는 백가를 향해 기울였다.
-그렇다면?
-그렇죠. 사실 영정은 여불위와 몸종 사이에서 수태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영정이란 아이가 왕위에 올라 전국을 통일하고 시황제에 등극한 것이지요.
-그것 참.
-결국 여불위는 그 대단한 수완으로 재상의 위에 오른 것은 물론, 제 아들을 천하 최초의 황제로 만든 것입니다.
모대는 입을 헤벌리고 이야기를 곱씹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네.
-이 얘기가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데.
백가는 실실 웃었다.
-그래요?
모대가 한참을 끙끙거리자 백가는 슬며시 은근한 투로 말했다.
-혹 자초라는 작자의 일생이 공자의 것처럼 느껴져서 그러시는지.
모대는 잠깐의 고민으로 그 속내를 알아차리고 의자를 박차며 일어섰을 땐 이미 백가가 저만치 내뺀 후였다. 낄낄거리며 달아나는 백가의 목소리가 점차로 멀어졌다.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그래도 이요는 제 아이를 수태하진 않았으니.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는 모대에게로 찬수류가 다가와 위로랍시고 말을 건넸다.
-빽 공자께서능 여불위 그늠이 워쩌케 뒤져불었는 중은 쏙 빼부는구마이. 그 여 가 놈은 애비도 못 알어보는 시황제으 손에 붙들려 죽고 말제라. 개죽음도 고런 개죽음이 없제요, 암만. 자석새끼 손에 죽는 거 맨큼 좆가턴 죽음이 어딨겄습니까.
-아휴, 내가 속이 뒤집혀 죽고 말지. 이 웬수야, 제발 좀 안 보고 살자!
-아니 임자, 요 조불조불헌 왕부에 함꾸네 붙어 사는디 안 보고 우째 산당가? 기왕지사 얼굴 맞대고 살거며는 웃으면서 살더라고, 웃으면서.
-저리 치워!
항용 그래왔듯 백제왕부의 아침은 유모와 말대인의 옥신각신하는 소리로 열렸다. 오늘은 유독 유모의 언성이 드높은 것이, 말대인의 희롱이 단지 말에 그치지 않고 섣부른 수작으로 이어진 까닭이었다. 은근하게 웃으며 유모의 뒤로 가만 다가가서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와락 유모를 껴안은 것이었다. 어제 번화한 홍등가에서 날이 새도록 창녀들과 진하게 몸을 섞은 기억이 남은지라 그토록 유모에게 과감할 수 있었다. 유모의 매운 손이 당장에 말대인의 염소수염을 스무 가닥은 족히 뽑아버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면서도 말대인은 히죽히죽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의뭉한 눈빛을 흘리는 것이었다. 유모는 답답한 가슴을 두드리며 거푸 탄식을 뱉었다.
-이녁도 부군 잃고 독수공방 허면서 얼매나 밤마다 외로웠능가. 나도 상처한 지 올해로 벌써 십 년이 되는구먼. 외짝끼리 서로 돕고 살잔 말일세. 내 나이 올해로 불혹이 되었지마는 아직 아랫도리에는 심이 넘친다니께? 의원이 은근히 이르기로 이 몸에 양기가 과하여 관 속에 들어갈 때꺼정 쇠하는 일이 없다는구먼. 어뗘, 마음이 동허시는가?
-동하기는 염병……
-아이이, 그러지 말구……
말끝을 흐리며 유모의 풍만한 젖통을 탐하는 손길을 뻗치던 말대인이 슬그머니 다시 제 무릎으로 손을 갖다놓은 것은 등 뒤의 사나운 기운을 감지하고서였다. 말대인이 헛기침을 험험 뱉으며 뒤를 돌아보니 과연 짐작한 대로였다. 이요가 허리에 손을 얹고 말대인의 뒤통수를 도사리고 있던 참이었다.
-거참, 매양 하던 것인디 멀 그리 죽을 동 보고 그랴……
그렇게 말하며 슬쩍 자리를 피하는 말대인의 손목을 이요가 낚아챘다.
-어딜 내빼요?
-내빼기능 누가 내뺀다그려……
모대는 대청에 드러누워 시종 씩씩했던 말대인이 이요의 앞에서 한없이 쪼그라드는 풍경을 관조하는 것을 취미로 하였다. 그날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곧 진저리를 치던 유모가 돌아서서 이요와 함께 말대인을 물어뜯을 것이었다. 이제 말대인은 두 여인에게서 호되게 쏟아지는 꾸지람을 온몸으로 받다가 종내 지쳐버려 도망치듯 마구간으로 향할 것이었다. 그것은 소싸움에서 꽁무니를 빼는 우람한 황소를 보는 것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구경거리였다. 막 유모가 달려들려고 하는 참이었다. 모대는 허리를 비스듬히 세워 알맞은 시야를 확보했다. 그런데 이 다음 장면은 모대가 그리던 것이 아니었다. 대문이 벌컥 열리더니, 집사 노인이 좋지 않은 관절을 삐거덕거리면서 부리나케 왕제 곤지의 집무실로 향하였다. 왜왕이 거둥한다는 기별도 느릿한 갈지자걸음으로 대령하여 아뢰던 이가 아니었던가. 이례적인 황급함에 모두의 눈길이 곤지의 집무실로 쏠렸다. 모대도 수상쩍은 낌새를 느끼고 대청마루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어 경내의 모든 일가붙이며 권속들이 소환되었다. 해 뜨는 때부터 지는 때까지 글방에 거하다시피하며, 끼니를 챙길 때에도 반찬에 한번 맹자에 한번 시선을 주고, 이불을 덮어도 호롱을 끄기 전에 그 날 익힌 대학이며 중용 따윌 술술 외기를 한결같이 하던 모대의 이복형인 사마도 서생의 표상다운 허연 낯빛을 발하며 종종걸음으로 아비에게 향하였다. 곤지는 동리에서 흙먼지를 묻히며 쏘다니는 제 아들들을 곧잘 불러 어깨를 주물러라 타구를 부셔오너라 시시한 심부름을 시키긴 했어도, 글공부에 매진하는 사마만큼은 훼방을 놓을 수 없다며 웬만해서는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사마가 급한 빛까지 보이며 곤지의 집무실로 향하는 것은 사안이 예사가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모대도 짐짓 낯빛을 흐리며 권속들의 걸음을 따랐다.
방안의 공기는 무거웠다. 머리를 싸쥔 채 등을 돌리고 앉은 곤지와 이것 참……하며 탄식을 연발하는 집사의 모습에서, 권속들은 영문은 몰라도 분위기는 눈치로 짐작하여 알았다. 그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곤지의 입에서 자초지종이 흘러나오길 바랐다. 곤지가 입을 뗀 것은 권속들이 모이고도 한참이 지난 때였다. 아랫것들은 뒷줄에 물러나있었고 제공자를 비롯한 일가붙이들이 앞줄에 대령했기에 모대는 곁눈질로 아비의 눈에 맺힌 물기를 선명하게 보았다. 모대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항시 강건하고 튼튼하시던 분이 아니신가. 어찌하여 저분이 눈물을 버티지 못하고 우시는가. 두려움으로 심장이 재게 박동하였다.
-거짓이라 말하고 싶다.
오밤중의 무덤처럼 곤지의 음성은 오싹했다.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그럴 힘도 없다.
무겁게 운을 떼는 그의 말에 권속들의 숙인 고개가 움찔움찔하였다. 곤지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머리를 싸쥔 손을 얌전히 내려놓고 그의 앞에 대령한 이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거짓이라 말하고 싶다던 사실을 탄식에 섞어 털어놓았다.
-고구려왕 거련이 정병을 이끌고 왕도를 침탈하였다. 어라하께서 난전 중에 변을 당하시고…… 태자가 급히 신라로 가 원병을 청하였지만 이미 왕도는 적의 수중에 떨어진 후였다. 태자께서 제신과 백성들을 이끌어 곰나루로 가 새로이 도읍을 정하고 어라하의 위에 오르셨다.
한 자 한 자 곱씹듯 내뱉은 곤지는 말을 맺고 다시 머리를 감쌌다.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전언에 도리어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다. 권속들은 한동안 멍하게 곤지의 말을 곱씹다가 마침내 그 말에 녹아있는 뼈저린 사실들에 풀썩 주저앉았다. 고구려왕 거련이 정병을 이끌고 왕도를 침탈하였다. 고로, 왕도의 궁전에서 고구려의 잡것들이 술판을 벌였다. 넉넉하던 곳간은 그들의 주안성으로 텅 비어버렸다. 숱한 백성들이 그들에게 겁간을 당하고, 종으로 부려지고, 성질이 억센 자는 대수롭지 않게 죽음을 당했다. 자식이 부모를 잃고 부모가 자식을 잃었다.
그럼 내 자식은, 내 부모는. 왕도에 두고 온 내 자식과 내 부모는 어찌 되었는가. 그제야 여기에 생각이 이른 이들은 집사에게 달려들었다. 내 자식은, 내 부모는…… 늙은 집사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애처럼 울어버렸다. 권속들도 덩달아 울었다. 내 자식은, 내 부모는 어찌 되었느냔 말요…… 쏟아지는 물음에 집사도 마침내 삭은 관절을 꺾으면서 답했다. 내 자식들도, 손주들도 왕도에 있었다. 나도 모른다. 그놈들이 칼을 맞고 죽었는지 용케 곳간에 숨어들어 그 여린 심장을 달싹이며 두려워하고 있을지 모른단 말이다…… 이들은 한참 울었다. 늘어진 곤지의 어깨도 파르르 떨렸다.
3
-바둑 두는 법을 더 연마해야겠군, 진남.
진남이 불계패를 선언하자 경사는 제가 두었던 상아 백돌을 도로 수습하였다. 경사의 말에는 자못 의기양양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임금의 가벼운 질책에 진남은 물러나 절을 올렸다. 하얀 수염이 바닥에 닿았다.
-신이 부단히 연마한들 어찌 어라하의 대단한 기량에 미치겠습니까. 판을 이만큼 끌어온 것도 어라하의 하해 같은 자비심의 탓인 줄로 압니다.
-저런, 늙은이의 둔한 감에도 들켜버리다니. 짐의 연기가 퍽 어설펐단 말이렷다.
-황송하옵니다.
경사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 이상 재미를 보기는 힘드니 그만 물러가라는 임금의 뜻이었다. 진남은 다시 절을 올리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경사는 시녀가 그득히 따라 올린 독주를 단숨에 넘기며 명하였다. 점잖은 걸음으로 물러나는 진남의 등 뒤로 그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왕사 도림을 들라하라! 역시 짐의 맞수는 오로지 왕사만이 가함이다. 이름 세 좀 떨치던 진남도 이제는 늙어 더 쓰지 못하겠구나.
어전에서 몰루나는 진남의 얼굴에 쓴맛이 번졌다. 꿈틀거리는 입 주위를 따라 하얀 수염이 덩달아 비틀렸다.
도림이란 승려가 왕사(王師)에 오른 것은 불과 열흘 전의 일이었다.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벌이 두려워 국경을 넘었다고 하였다. 남당(南堂, 백제의 조정)의 중론은 도림이 고구려의 간자가 분명하니 국문하고 처단하자는 것이었다. 경사도 그럴 참이었다. 도림의 말을 믿어주기에는 그 수법이 고루했다. 그러나 도림이 바둑을 입에 올리자 경사의 눈이 뒤집혔다.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바둑의 명수들도 경사의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왔다. 경사는 임금이요 나라의 으뜸가는 바둑꾼이었다. 더불어 바둑광. 목을 베는 것은 화급한 일이 아니니 바둑이나 한수 둬보자며 경사는 도림을 마주하고 앉았다. 중천에 걸려있던 태양이 노을을 뿌리며 서산마루로 서서히 저물 적까지 둘은 승부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점차로 경사의 수가 느려졌다. 장고하니 악수는 필연이었다. 경사의 불계패였다.
-네 솜씨가 쓸 만하다.
그것은 사면령이었다. 사면에 더하여 두터운 신임의 싹이 되었다. 조반을 들고 곧장 도림을 대령케 하여 대국을 하더니 이러저러하게 아뢰는 상소들의 더미를 뒤로 물리고 오로지 대국에만 힘을 쏟았다. 진남이 어전에 나아가 늙은 몸을 바닥에 깔고 아뢰기를, 도림을 베고 국사에 전념하소서 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근왕병의 매서운 몽둥이찜질이었다. 남당의 원로인 체면에 눈물이 배어나왔다. 경사가 기꺼워하는 태자 모도의 아룀도 소용이 없었다.
대국에 열중하던 도림이 입을 열었다. 이제껏 경사가 솜씨를 치하하면 송구하나이다 한마디로 그치던 이였다. 궁전이 심히 좁습니다. 도림이 슬그머니 운을 뗐다.
-좁다?
경사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도림은 바닥에 엎드렸다.
-신이 불경스런 말을…… 송구하나이다.
-새로이 궁을 중수하였다. 그럼에도 좁더냐.
-어찌 미천한 분수로 어라하의 궁을 논하겠습니까. 부디 신의 불경을 용서하여주십시오.
-네놈은 고구려의 종자라 하였다.
-그러하나이다.
-그러하다면 네놈의 분수에 궁전이라고는 보아야 거련〔長壽王〕이가 엉덩이를 비비고 있는 평양성이 고작일 터. 한성이 평양보다 못하더냐.
-죽여주십시오.
경사는 엄히 말했다.
-임금의 물음에 답하지 아니하는 것이야말로 목을 벨 일이다.
도림은 마지못한 듯 엎드린 채로 아뢰었다. 그의 전언은 경사의 피를 끓게 하기에 족했다. 평양에 비하자면 어라하의 한성은 궁벽한 시골 관아에 오히려 가깝습니다. 임금의 힘은 높게 솟은 궐의 누각에서 나오는 법. 헌데 신이 한성에 이르러 궐의 좁음을 보자니 뭇 신료들이 어라하의 일에 시시콜콜 간섭함이 전연 이상하지 않습니다. 왕도의 성벽을 굳게 다지고 궁전의 누각을 높이며 보좌를 황금으로 치장하면 그들이 자연히 어라하의 성위에 굴복할 것인즉, 신의 사사로운 소견일지언정 부디 뿌리치지 마시오소서.
경사는 얼마 전 어전에서 생떼를 쓰던 늙은 진남을 떠올렸다. 경의 말이 지극히 옳다. 이 진언으로 도림은 왕사의 자리를 얻었고 경사는 나라의 물산을 오로지 왕사의 뜻대로 운용하였다. 남당은 천대를 받았고 국사는 경사와 도림의 바둑판 위에서 이루어졌다.
-어라하가 국사를 외면하고 남당을 능멸함이 지나치다.
진남은 어전에서 물러나 찬바람이 부는 빈 남당을 두고 그대로 퇴청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는 진남의 뒤를 이어 진씨 가문의 가주가 될 재목이자 내로라하는 귀족 자제들 중에서도 기린아로 꼽히는 진로였다. 화를 누그러뜨리시라 내민 찻잔에 진남은 분개하는 와중에도 갸륵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는 무심코 팔을 주무르다 몸의 곳곳에 번진 피멍을 건드리는 탓에 이를 악물며 고통을 삭였다. 근왕병으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은 것이 물경 스무 날이 지났건만 피멍은 가시기는커녕 도리어 보랏빛으로 흉하게 번지는 것이었다. 새파랗게 나 어린 근왕병의 방자한 눈빛이 무시로 떠올라 화증이 속을 메우는 것도 차도를 더디게 했다.
-분하다. 너무나도 분하다, 로야.
진남은 여름날 활짝 열린 여닫이를 통해 보이는 난간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난간에는 구름을 타고 오른 흑룡이 번지르르한 비늘을 빛내며 용트림하는 깃발이 걸려있었다. 유서가 퍽 깊은 것이었다. 진씨의 대대로 내려오는 흑룡답운기(黑龍踏雲旗)는 그 자체로 가문의 대단한 역사이고 오랜 영광이었다. 고래로 정사를 논할 적에는 항상 저 기가 남당의 높은 곳에 걸려있었다. 고이대왕이 벼슬을 십육 등으로 나누고 각기 복색을 정하기 전에는, 이 나라의 재상은 좌보와 우보라 불렸다. 먼 옛날부터 좌보와 우보 중 하나는 반드시 진씨의 몫으로 떨어져왔다. 고이대왕의 이후로 재상이 좌·우보에서 여섯 좌평으로 바뀐 뒤로도 가장 위세가 좋은 좌평 자리 하나는 꼭 진씨 성의 아무개가 차지했다. 어디 그뿐이던가. 근초고대왕 이후 어라하의 세계는 부여씨 일통으로 내려온 것과 마찬가지로 어륙은 반드시 진씨의 일통이었다. 부여씨가 나라의 아비라면 진씨는 항용 나라의 어미였다.
주몽의 적장자인 유리에게 내쫓겨 이 땅에 뿌리내린 온조가 지금껏 대왕으로 떠받들어지고 그 자손이 영영 왕위를 차지해온 것은, 비단 온조와 그 노복들이 아주 잘난 까닭만이 아니었다. 욱리하 일대에서 터줏대감을 자처해온 예맥족속의 진씨 일가의 전폭적인 협력이 없이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온조와 그 대대의 자식들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았고, 외면하자니 진씨의 힘이 부여씨의 것에 전연 뒤지지 않는지라 어라하의 자리를 부여씨가 아예 제몫으로 삼고도 진씨의 눈치를 보며 어륙의 자리는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비교적 근자에 들어 상황이 뒤틀렸다. 열여덟째 어라하인 전지대왕이 즉위하면서부터다. 열여섯째 진사대왕과 열일곱째 아신대왕이 고구려의 담덕·거련 부자에 된통 당하여 나라의 위신이 추락하고 물산이 크게 감하였다. 아신대왕이 고구려에 대한 화증으로 마침내 분사하니, 그의 적장자인 태자 전지가 왕위를 잇게 되었다. 전지가 왜에 체류하는 까닭으로 아신대왕의 둘째아우인 훈해가 임시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런데 셋째아우 첩례가 난을 일으켜 훈해를 참살하고 왕위를 침탈하려 했다. 전지는 국난을 듣고 귀국을 서둘렀다. 왕도에 입성하려던 전지를 급히 막은 것은 당시 해씨의 가주였던 해충이었다. 그가 아뢰기를, 지금 첩례가 난을 일으켜 성좌를 찬탈하고 어라하를 참칭하는 그 해악이 극심합니다. 전하께오서는 우선 왕도에 납시지 마시옵고 난이 진정된 연후에 들어 어라하의 위에 오르소서 하였다. 전지가 그대로 따랐다. 해충이 제 가병들을 이끌고 첩례와 그 역당을 토평하고 전지를 어라하에 옹립하니, 그날로부터 하여 해씨의 위세가 하늘 가운데 걸려 세상에 빛을 쪼이는 햇덩이만큼이나 높아진 것이었다.
-비루먹은 노새 같은 놈들, 부여의 밑을 핥던 무리들이……
진남의 욕지거리에는 순전한 증오심이 서리었다. 해씨에 향하는 진씨의 혐오가 그토록 깊었다. 해씨는 온조의 남하 때 그의 말구종이나 하던 족속들이 아니던가. 개국공신의 반열에 오르고 제법 거드름 부릴 만한 벼슬을 받고 하여도 항시 위치는 진씨의 다음가기 마련이요 만년 이등귀족이었던 것이다. 부여씨가 그 가문의 표상을 황룡으로 삼고 진씨가 그에 버금가는 흑룡을 삼은 것에 비하여 해씨는 고작해야 수사슴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본시 격조 낮은 집안이 해충의 일로 해서 일등귀족의 반열에 오름은 물론 항시 진씨의 몫이었던 왕비족의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해씨는 전지대왕의 밑으로 구이신대왕, 비유대왕을 거쳐 금상인 경사의 대에 이르러서도 거푸 어륙을 배출해내고 있었다. 그에 반하여 당시의 미련한 진씨의 가주는 첩례의 편에 붙는 통에 가문의 내력으로 멸문은 면하였어도 이제껏 그 세를 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첩례의 때보다도 더 미련한 진씨의 가주가 바로 진남의 전대에 있었다. 진남의 아비이기도 한 그는 진남에게 항상 나의 추한 아비라 불리었다. 그 패련적인 명명에도 일족들이 토를 달지 못하는 것은, 저마다 그럴 만하다는 암묵적인 공감을 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세가 눌린 채로 세월을 견뎌오던, 진남의 말마따나 그의 추한 아비는 일대의 굉장한 도박판을 벌려보기로 하였다. 특별한 수가 아니면 영영 가문의 위상을 복구하지 못하리라 여긴 모양이었다. 역모로 허물어진 가문을 역모로 일으켜보고자 한 것이었다. 역모는 성공하였다. 진씨의 가병은 왕궁으로 밀고 들어가 비유대왕과 그의 어륙을 베어버리고 성좌를 장악했다. 그를 옹위하던 해씨의 좌평들도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러나 오로지 가문의 세를 뻗쳐보고자 벌인 역모는 명분이 없는 것이었다. 명분 없는 역모는 얕은 뿌리의 교목처럼 무너지기 쉬웠다. 전열을 정비한 해씨 일문이 역당 타도를 외치며 나라 안팎의 군마를 끌어 모았다. 그 정점에는 태자 경사가 있었다. 그는 물정 몰라야 마땅할 나이에도 씩씩하게 대열의 맨 앞에 서서 왕도를 탈환하였고, 진씨의 세는 극도로 쪼그라들어 세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지경이 이르렀다. 진남의 추한 아비는 거열형으로 다스려졌고 일문 삼십 여의 목이 잘렸다. 가병은 해산되었고 가산은 적몰되었다. 진씨의 본가는 한성에서 추방되어 경기의 황무지에 다시 세워졌다.
-아픈 시절이었다……
진남의 생각은 그 뼈저린 세월로 향했다. 지그시 감은 눈가의 주름이 미동하였다. 진로는 묵묵히 진남의 빈 잔에 차를 따랐다. 그 질곡의 세월을 모르는 후생이 위로랍시고 떠들어봤자 순 헛말이 되고 마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역당의 꼬리표가 붙은 삼류귀족으로 전락한 진씨의 운명을, 호사가들은 비관적으로 쑥덕거렸다. 눈시울이 시큰할 만큼 자랑스러웠던 흑룡답운기는 이제 동리의 조무래기들도 코웃음을 치는 천더기가 되었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진남은 목숨을 건져냈다. 창칼을 번득이며 의기양양한 태자 경사의 앞에 절을 올리며 살려주시라 애걸했다. 그래, 네가 그토록 살고자 한다면 스스로 너의 귀를 잘라라. 그리함으로써 네 아비로부터 들었던 삿된 계책들을 씻어내라. 그 정도 각오는 있어야 목숨을 건지지 않겠는가. 너는 역당 수괴의 적장자가 아니더냐. 경사가 지껄이는 요구에 진남은 망설임 없이 귀를 절단하였다. 경사는 머리통의 왼쪽구멍에서 붉은 피를 뿜는 진남을 보며 통렬하게 웃어주었다. 진남은 외짝귀란 치욕스런 별칭을 얻고 물경 십년 간 서궁에 유폐되어 시종도 없이 푸성귀와 누더기로 연명했다. 경사는 틈이 나면 곧잘 서궁에 거둥하였는데, 외짝귀 진남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한번 웃고 그와 바둑을 둬 끝내 불계패로 몰고 간 뒤 두 번 웃고 돌아갔다. 지독한 날들이었다. 마침내 경사의 즉위 십 년을 기하여 진남은 사면되었다. 심신의 기운을 탕진한 뒤였다. 진남은 몸을 낮추고 어라하의 비위를 맞추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여기까지 이르렀다……
간신히 진씨 몫의 좌평 자리를 되찾았다. 뿔뿔이 흩어졌던 가병들도 은밀히, 조금씩 불러 모았다. 한성에서 벗어난 경기의 본가는 궁벽하였지만 그만큼 보는 눈이 적었다. 여전히 외짝귀 진남은 어라하의 앞에서 굴신하였지만 그 내실은 예전의 웅력을 반절은 되찾은 참이었다. 진남의 목표는 오로지 이 여물어가는 과실을 제 뒤를 이을 맏손자의 입에 넣어주는 것이었다. 깜냥이 달리고 배포가 작은 진남의 적장자이자 진로의 아비는, 진남으로부터 제 할아비와 같이 나의 추한 아들이란 부름을 얻고 저 남쪽의 별가로 귀양 가다시피 하였다. 진남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일문은 가주의 말을 따라 그를 존중하지 않았다.
-로야.
오랜 기억 더듬기를 마친 진남이 눈을 떠 진로를 불렀다. 그 오랜 환란을 견딘 것이 오로지 너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을는지. 어찌 이다지도 어여쁘더냐. 장하고 갸륵하고 대견하다. 진남은 진로의 단단하게 솟은 콧대가 미더웠다.
-너는 반드시 저 흑룡기를 황룡과 나란히 두어야한다. 얼마가 걸려도 좋다. 얼마가 죽어도 좋다. 꼭 저승의 나에게 그 찬란한 풍경을 보여주어라…………
-그리 하겠습니다.
진남은 입가를 씰룩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울러 오만한 사슴은 그 뿔을 잘라라.
해씨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 또한 그리 하겠습니다.
진남의 해씨를 향한 병적인 증오심은 다만 그 억울한 역사에 연원을 두는 것만이 아니었다. 진남이 생생히 겪은 한 인물의 탓이었다. 해씨의 우두머리이자 귀족의 좌장이며 어라하의 충실한 주구. 상좌평 해구였다. 해씨 본래의 습속이 그러하듯 해구는 밸도 없이 어라하의 앞에서 아양을 떨었다. 적적해하는 어라하를 위하여 연지곤지를 바르고 병신춤을 추기도 하는 자였다. 그런 그는 아랫것들에겐 뱀처럼 냉혹하고 사나웠다. 그의 위에는 오로지 어라하뿐이니 어라하를 제하고는 모두에게 그리하는 것이었다. 그놈을 떠올리니 화증이 돋는다. 진남은 언짢은 얼굴로 찻물을 한껏 머금었다.
가주 어른, 상좌평 어른 행차십니다. 집사가 길게 목을 빼고 아뢰었다.
-쌍놈의 새끼.
진남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저벅저벅 격조 없는 발소리가 이쪽으로 가까워졌다. 여― 이 사람, 해구올시다. 경박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쪽에서 드시라 허하지도 않았는데도 해구는 미닫이를 드르륵 열고 그 육중한 몸뚱이를 드러냈다. 진남과 진로가 일제히 기립하여 몸을 숙였다. 진남은 방금 전의 노기는 지워내고 해사하게까지 웃으며 그를 반겼다.
-좌평 진남이 상좌평 어른을 뵙습니다.
-어어― 나보다 손위가 아니시오. 어른 소리가 듣기 멋쩍소.
그러면서도 자못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품이었다.
-덕솔 진로가 상좌평 어른을 뵙습니다.
덕솔의 인사는 가벼운 고갯짓으로 받았다. 겹겹이 층진 턱살로 인하여 고갯짓을 했는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왕도에서 황량한 벽지까지 납시는 데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생각보다 촌이긴 하더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무명으로 감싼 진남의 왼쪽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벌레가 그 주변을 구물거리는 듯 근질근질한 느낌이 일었으나 진남은 내색하지 않았다.
-날이 덥잖소. 뭐 하러 그리 꽁꽁 싸매고 계시오.
진남은 역겨웠다. 왼쪽 귀를 절단하고 선혈을 흘리는 장면을 보며 웃던 경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더 소란스레 웃어대던 네놈이 아니었느냐. 성미가 참으로 못되었다. 그는 속으로만 힐난했다.
-늙으면 여름 바람에도 뼛골이 시린 법입니다……
-허허, 몸조리를 잘하시구려.
-헌데 어인 일로 예까지……
진남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 실은 간단한 일은 아니오. 어라하께서 특별히 명하신 일인지라.
-무슨.
-왕사 도림이 어라하께 진언하지 않았소. 궐을 중수하고 성벽을 높게 쌓으시라. 어제는 그 얘길 하더군. 고구려의 수정궁 이야기를 말이야.
-수정궁이요.
진씨의 법도가 손님에게 다과상도 내오지 않느냐며 진로를 가볍게 질책한 후 해구는 말을 이었다. 진로는 잰 걸음으로 달려가 집사를 타박했다.
-평양에는 이러저러한 누각들이 많은데, 오로지 수정만을 깎아 만든 수정궁이 있다 하더군. 밤에도 그곳만큼은 낮처럼 밝아 여간 장관이 아니라 하던데.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어라하께선 무엇보다도 고구려를 미워하는 분이신데. 고구려가 가진 것보다 더 귀한 것을 얻고자 하시니…… 심히 어심이 동하는 눈치던데.
-중수한 궐을 다시 중수하는 것만으로도 백성들의 고초가 심합니다. 더 가혹해서는 아니 됩니다.
-공께서는 말씀을 이상하게 하는구려.
진남은 눈짓으로 물었다. 무슨.
-백성들은 조정을 위하여 있고 조정은 어라하를 위하여 있소. 어라하께서 원하시면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오. 심하니 가혹이니 주워섬길 계제가 아니란 말이오.
해구는 맹자의 말을 거꾸로 외고 있었다. 백성이 가장 중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군주가 가장 가볍다 하였거늘. 배워먹지 못한 놈.
-허나 근자에 흉년도 들고 하여 형편이 매우 궁합니다.
-허,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군. 백성들이 부단히 힘쓰는 건 알고 있소. 충직하고 유순한 자들이지. 헌데 당신은 어떨까.
-저 또한 마찬가지로 어라하께 심신을 바쳤습니다.
-그렇소?
되물으며 빙글빙글 웃는 모양이 미심쩍었다. 진남의 예감은 들어맞았다.
-그러면 그 증좌를 보이시구려.
-증좌요.
-댁에 황금과 수정 등속이 많잖소. 그것을 조금 내놓으시는 건 어떨지.
-가문의 세가 미미합니다. 어찌 그런 것이……
-둘러댈 생각일랑 말구려. 나는 당신과 협상하러 온 것이 아니오. 어라하의 명을 전하러 왔을 뿐. 어라하께 심신을 바쳤다 하질 않았소. 그 충정의 편린이라도 보이시오.
해구는 싯누런 이를 드러내며 비식비식 웃었다. 진남은 저 치의 입으로 들어가는 찻물도 아까웠다.
-대인께선 어라하께 사정을 잘 말씀을 드려주십시오. 보다시피 벽지에 땅이 기름지지도 않을뿐더러……
-허어, 어찌 이리도 둔해지셨소. 아니면 어라하를 향한 충정이 늙는 몸을 따라 쇠한 것이오?
-그것이 아니오라……
-도림이 선왕의 얘기를 꺼내더이다.
시종 웃음기를 잃지 않던 진남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선왕은 진씨에 있어 가장 아픈 구석이었다. 그 고구려 땡추가 기어이 그 일까지 운운하고 다니는가. 경사의 반응은 보지 않아도 빤했다. 땡감을 베어 문 듯한 기색에 해구는 뱃가죽을 들썩이며 걸걸하게 웃었다.
-지금껏 선왕의 능을 조성하지 못했잖소. 임금의 위엄을 세우려면 성대하게 왕릉을 세우시라 하더군. 뭐, 영 틀린 말은 아니잖소.
해구는 그것으로 말을 맺고 한성으로 돌아갔다. 진남은 낯을 흐린 채로 그를 전송하였다. 해구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 없는 욕지거리를 퍼부어주었다. 지금껏 선왕 운운하는 소리가 안 나오도록 그 모진 세월을 묵묵히 견디었거늘. 진남은 해구와 더불어 도림이 괘씸했다.
날이 밝자 한 떼의 달구지들이 경기의 진씨 본가에서 한성의 북문으로 향했다. 이어서 달구지 떼에 답하는 무성의한 어지(御旨)가 그 반대 방향으로 갔다. 수고하였다. 진남은 어라하의 사자가 돌아가자마자 어라하의 성지를 호롱에 불살랐다. 진로는 호롱에 비친 진남의 그림자를 엿보았다. 진남의 그림자는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진로는 물러나 소리 죽여 울었다.
진씨를 비롯하여 숱한 귀족들이 한성으로 부단하게 물자들을 실어 날랐다. 들보를 세울 목재들이며 성좌와 왕릉을 꾸밀 보화들이며 기와와 막새, 벽돌, 역부들을 먹일 쌀과 푸성귀, 더불어 왕실에 대한 충성을 입증하여 눈치껏 헌납하는 비단과 황금 등속. 백씨는 대대로 내려오는 명궁을 왕도에 바쳤고, 연씨는 영롱한 빛의 담가라말을 진상하였다. 해씨는 가문의 세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거대한 황금 대불을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진상하였다. 진씨도 울며 겨자 먹기로 누대의 가보인 야명주를 바쳤다. 복속한 지 오래건만 여전히 반골의 기상이 팽배한 옛 마한의 땅에서 역부들이 징집되어 왕도로 향했고, 조세의 짐이 무거워졌다. 민심이 탁해졌고 관아의 곳간은 비었다. 왕도로 온 나라의 물자들이 집결하였다. 이를 출세할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긴 약삭빠른 변방의 외관들은 관군의 창칼을 녹여 선왕의 넋을 기리는 절간의 당간지주로 삼아 헌상했다. 나라의 힘이 부쩍 쇠했다.
경사는 온조대왕의 것에 버금가는 부왕의 능침을 바라보았다. 코끝이 시큰했다. 그가 부왕의 능을 굽어보는 곳은, 새로이 축조된 누각인 망선대(望先臺)였다. 선왕의 능침을 바라본다 하여 망선대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궐의 중수가 한창이었다. 역부들이 부단히 흙과 벽돌을 나르는 현장을 보고 도림은 경사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고구려왕이 이 웅장한 광경을 본다면 곧장 어라하의 어전에 부복하고 나라를 들어 바치려 할 것이옵니다. 실로 삼한의 으뜸에 걸맞은 궐입니다. 자연히 못된 망아지와 같던 귀족들도 이제는 어라하의 말씀에 감히 어깃장을 놓지 못할 것인즉 만대에 영화를 누릴 것입니다. 경사가 듣기에 심히 기꺼웠다. 그는 도림의 기특한 말을 치하하며 궐이 축조되면 너를 좌평으로 삼아 치세를 이루리라 하였다.
-왕사 도립을 불러라 바둑을 두어야겠다.
날이 밝자마자 경사는 으레 그래왔듯 도림을 청했다. 마땅히 한 식경 안에 어전에 대령함이 마땅했다. 헌데 돌아오는 대답이 괴이했다.
-왕사께서는 어제 늦은 밤에 출타하여 돌아오지 않았나이다.
-어디를 간다고 하더냐.
-어명을 수행함이다 이르고 더 말씀이 없었습니다.
-짐은 명을 내린 바가 없거늘.
그간 도림이 벌려 어그러진 일이 없었으니 경사는 잠자코 그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경사는 망선대에 나아가 부왕의 능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좌로 우로 시선을 돌려 저가 이룩한 거대한 역사를 관망했다. 부왕께서는 지켜보소서. 불초 소자, 반드시 이 나라의 영화를 이루겠나이다. 제법 당천 각오도 되새겼다. 그러다 문득 북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았다. 한 줄기로 곧게 피어오르는 연기는 화재가 아니라 봉화였다. 북쪽에 변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경사는 숙위를 맡은 위사좌평을 불러다 사정을 물을 속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그가 헐레벌떡 망선대로 오르고 있었다. 경사가 하문하기도 전에 그는 부복하며 급히 아뢨다.
-어라하께 아뢰나이다. 고구려왕 거련이 삼만 대병을 동병하여 철기를 앞세워 국경을 침탈하였나이다. 그 휘몰아치는 기세가 강성하여 이미 칠중하(임진강)를 넘었고 곧 한성에 도달한 것이옵니다. 어라하께서는 남으로 파천하시고 후일을 도모하소서.
-뭐라!
일거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 경사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럴 수 있는가. 북방의 경계는 탄탄하다. 신묘한 군략을 거련일지언정 그 두터운 방비를 일거에 뚫기는 불가하다. 그 의문을 급박한 위사좌평의 보고가 해소해주었다.
-왕사 도립이 고구려의 간자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간밤에 어라하의 명을 빙자하여 북방의 국경으로 향해 거련과 접촉하였나이다. 그가 나라의 지형과 산천을 고하고 왕도로 향하는 요로를 일러주어 거련은 방비가 취약한 요소를 택하여 남하한 것이옵니다.
-도림이 간자였는가……
경사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위사좌평이 그를 급히 부축했다.
-부디 마음을 굳게 자시고 파천하시오소서. 왕도의 방비가 거련을 막기에 크게 약합니다.
-왕사가 간자였는가……
-어라하!
경사의 풀린 시선이 망선대의 바깥으로 향했다. 고구려의 남하 소식이 저곳에도 전해진 듯 역부들은 우왕좌왕하며 장수의 통솔에 따라 현장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저것이 몽땅 간계였는가. 도림의 곰살갑던 충언이 모두 허위였는가. 나를 해치려는 말이었는가. 궐의 높다란 누각, 성대한 왕릉, 호화스런 성좌…… 저것들이 죄다 고구려의 셈속에 놀아남인가. 내 손으로 저것들을 저지른 것인가. 나는 정녕 죄인이다. 부왕께 영화를 이루겠다 고하였다. 헌데 이 무슨 참괴한 일인가. 도리어 왕도를 앗기고 열성조의 고귀한 유해를 몽땅 앗기게 되었구나. 내 어찌 명을 부지할 수 있느냐. 부끄럽고 죄스러워 더 살지를 못한다. 무거운 죄책감이 경사의 가슴을 짓눌렀다. 개국 이래 왕도를 빼앗긴 어라하는 없다. 온조대왕의 원령이 목을 조르는 듯 경사는 숨이 막혔다. 그는 연신 눈을 슴벅거렸다.
-어찌… 어찌…….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어라하!
-어찌……
-어라하!
위사좌평은 절규하듯 경사를 불렀다.
-어찌… 내가 왕도를 두고 떠나겠느냐…… 나는 그럴 수 없다.
-떠나셔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 나는 왕도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다. 내 어찌 왕도를 등지겠느냐. 왕도와 함께, 내 불충과 불효와 어리석음과 함께 허물어지리라.
위사좌평은 고개를 저으며 망선대를 내려갔다. 왕의 궁상스러운 한탄을 들어주기에는 사태가 급박하였다. 태자 모도는 신라로 원병을 청하러 급히 떠났다. 활짝 열린 남문으로 왕도의 사람들이 앞 다투어 쏟아져 나왔다. 어라하의 곁에는 두려움에 몸을 떠는 몇몇 궁인들만 남았다. 호기로운 근왕병 몇몇도 그를 지키고 섰다. 성벽이라도 온전하면 그것에 의지하여 버티겠건만 중수를 한답시고 반쯤은 허물어 북방의 철기와 겨루기는 어려웠다. 신하들은 파천을 거푸 권하다 경사가 듣지 않으니 그를 버리고 남으로 달아났다. 왕의 곁에서 청승맞게 울며 생죽음을 함께 당해줄 만큼 굉장한 충신은 없었다. 상좌평 해구도 좁쌀 같은 눈을 좌우로 굴리다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멀리서 땅을 울리는 발굽 소리가 북풍을 타고 들려왔다. 경사는 일어나 부왕의 능침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절을 올렸다. 경사의 뺨을 타고 더운 눈물이 흘렀다. 소자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겁니까. 어떻게 일군 땅입니까. 역사입니까. 소자가 왕도를 잃었습니다. 한수를 잃었습니다. 소자가 죽은들 죄가 씻기겠습니까. 경사는 엎드린 채로 몸을 떨었다. 발굽 소리가 점차로 가까워졌다. 그들이 말아 올린 흙먼지가 망선대를 휩쓸고 지났다. 경사의 얼굴에도 흙먼지가 씌었다. 눈물에 엉긴 먼지가 거칠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떠는 궁녀, 넘기는 침에 거푸 목울대가 울리는 늙은 내관, 눈썹까지 내려오는 투구를 쓰고 어설픈 자세로 창을 쥔 소년 근왕병. 경사는 눈물을 흘렸다. 탄식하듯 말했다. 너희에게 내 지은 죄가 막심하다. 참으로 미안하다…… 서서히 흐려지듯 물기로 차단되는 경사의 시야로 고구려의 깃발들이 나부꼈다. 말발굽 소리와 왁자지껄한 북방의 함성소리가 그의 귓전을 괴롭혔다.
4
백제왕부에는 스산한 공기가 감돌았다. 주인인 곤지가 어수선한 남당을 진정시키고자 급히 곰나루로 떠난 까닭이기도 하였고 여전히 식구들의 생사를 모르는 왕부 권속들의 불안한 기다림이 계속되는 까닭이기도 했다. 모대도 전처럼 장난질을 일삼지 못했고 말대인 찬수류도 건초더미에 몸을 누인 채 허공을 바라보며 탄식만 뱉을 분이었다. 유모의 빨래하는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부엌데기는 수저를 놓다 말고 멍한 잡념에 빠지곤 했다. 마당을 쓰는 사내종은 비질을 하다 대문까지 향한 줄 모르고 문지방에 걸려 고꾸라졌다. 나무를 하러 갔던 머슴은 눈이 벌게져 돌아오길 예사였다. 공부벌레 사마도 대청에서 한숨을 쉬며 세월만 죽였다. 왕부의 사당에는 경사의 위패가 모셔졌고 하얀 휘장을 둘러 이역만리에서의 국상을 치렀다. 왜왕도 제 수하를 거느리고 경건히 조상했다. 왕부의 권속들은 사당에 나아가 어라하의 위패에 절을 올리면서 생각은 왕도에 두고 온 제 피붙이와 이웃들을 떠올렸다. 막이 이놈아 명줄 잘 붙들고 있느냐…… 어머니, 살아 계시지요…… 옆집 탐모라댁은 억척스러우니 어떻게든 배곯지 않고 그 번드르르한 개기름을 빛내며 버티고 있을 테지……
모대는 대청에 모로 누워 마당 쪽을 바라보았다. 마땅히 말대인과 유모 사이의 옥신각신하는 경쾌한 소리가 들려야 마땅했지만 마당은 싸움이 끝난 전장처럼 조용했다. 모대의 마음이 침울했다. 그는 반대로 돌아누웠다. 대문을 등지던 곤지의 늘어진 어깨가 모대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대문을 나서기 전 모대의 어깨를 힘지게 붙들며 당부했다. 그 또렷한 음성이 모대의 주변을 맴돌았다. 네가 여기는 것보다 더 큰 짐을 지게 될지도 모른다. 매사에 대범하고 산처럼 흔들리지 말거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머뭇거리지 말고 살처럼 뛰어들어라. 아비는 네가 반드시 그러리라 여긴다. 모대는 그 말을 경전처럼 떠받들면서도 의문을 품었다. 다복하시어 슬하에 자식을 숱하게 두셨거늘 어찌 내게만 이런 말씀을 남기시는가. 고개를 들어 그 까닭을 여쭈려 할 대에는 이미 아비는 문지방을 넘고 있었다. 모대는 바닥에 엎드려 아비를 전송하며, 뜻대로 하겠습니다 나지막이 다짐했다.
곤지가 떠난 왕부는 사마가 대신 다스렸다. 제 공자 중에서 사마의 나이가 제일 많기도 하거니와 그 혈통의 고귀함이 다 같은 왕가의 일가붙이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모대를 비롯해 숱한 형제들은 대개 곤지가 왜로 건너와 얻은 축자부인의 소생이었다. 사마의 태생은 이들과 달랐다. 곤지가 왜로 건너갈 적 그를 각별히 여기던 경사는 그의 총애하는 후궁을 내주었고, 곤지는 그 후궁의 사이에서 사마를 얻었다. 왜국이 백제의 혈맹이라 하여도 왜인을 본국인과 동격으로 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 본국인이 어라하의 후궁이라면 그 격은 운니지차로 벌어졌다. 서열과 혈통에서 우위에 있고 공부에 매달려 박학한데다 품성마저 음전하니 그가 아비를 대리하는 것에 다른 이들이 이렇다 저렇다 딴 소리를 입에 올릴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모대 역시 이의가 없었다. 뭇 사람들의 기대대로 사마는 중의를 잘 수렴해 현명하고 야무지게 왕부를 꾸려나갔다.
사마는 모대에게 어려운 형님이었다. 저자와 야산에서 짐승처럼 날뛰던 모대는 사마의 앞에서는 공손히 손을 모으고 꾸벅 허리를 꺾었다. 비단 저보다 손위고 배운 것이 많은 탓만은 아니었다. 사마의 말투와 행동거지가 얌전했지만 눈빛에는 결기가 서려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자면 야망으로까지 비칠 만큼 강렬하고 함부로 대하기 힘들었다. 곤지가 곧잘 평하기로 모대는 불이요 사마는 물이라 하였다. 불은 산맥을 삼킬 만큼 드세지만 그 기운이 셈하기 쉽고 그러한 까닭으로 제압하기 쉽다 하였다. 그러나 물은 고요하다 휘몰아치고 얕다가 깊으니 알고자 하면 도리어 패배하고 만다 하였다. 오행의 이론에서 가르치기로 수극화(水克火)하니 모대가 사마의 앞에서 한없이 쪼그라드는 것이 당초에 정해진 이치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대야 사냥을 가자.
사마는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대청에서 시간을 죽이던 모대는 흠칫 놀라며 지금 뭐라 하시었습니까 되물었다.
-사냥을 가자 했다.
모대가 허리춤엔 꿩을 매달고 어깨엔 노루를 짊어지고 귀가하는 날이면 사마는 조용히 낯빛을 흐리고 아랫입술을 가만히 깨물지 않았던가. 사려 깊은 성품에 싫은 말은 이르지 않았지만 모대는 낌새로 알 수 있었다. 사마가 사냥을 혐오한다는 것을. 잠시의 환락을 위해 무고한 생명을 해치는 광포한 유희로 여긴다는 것을. 모대는 사마가 사당의 뒷문으로 들어가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리던 모습을 애써 모른 체했었다. 짐승을 위령하다니, 그만큼 별쭝맞은 일이 어디 있는가. 입을 삐죽이면서. 그런데 이날에 이르러 형님 스스로 사냥을 가자 권해오니 별일이 다 있다 싶었다. 모대는 그 제안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어려운 형님이 사냥에 재미를 들이면 편하게 함께할 수 있을 것이고, 시종 위압되던 관계를 떨치고 빼어난 활솜씨로 형님의 콧대를 눌러버릴 수가 생기겠다는 은근한 호승심이 발동하기도 했다.
모대는 거세게 말을 몰며 시위를 당겼다. 모대 패거리들은 몰이꾼을 자처하여 징 치고 고함지르며 꿩·토끼·사슴 따윌 궁지로 몰았다. 혼비백산한 짐승들을 모대는 거푸 쏘아 맞혔다. 정확히 목줄을 뚫는 솜씨에 짐승들은 소리 없이 고꾸라졌다. 가죽이 두껍고 날랜 멧돼지라고 하여 예외일 수는 없었다. 사마의 솜씨도 백면서생의 것 치고는 못 봐줄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빼어난 모대에 견주어서는 흥이 살지 않았다. 제법 헤아린다고 헤아려 살을 먹였지만 연달아 세 발이 헛물만 켜게 되자 사마는 슬그머니 낯빛을 흐렸다. 활을 쥔 손은 아래로 향했고 고삐는 느슨해졌다. 사정 모르는 모대는 양 손에 꿩의 모가지를 틀어쥐고 사마의 앞에서 환히 웃어 보이니, 전연 내색이란 걸 모르던 사마도 언짢은 빛이 또렷이 번졌다. 동행한 백가가 곁눈질을 하며 서너 번 눈치를 주고 나서야 모대는 목을 움츠리며 입맛을 다셨다. 이미 사마의 속은 상할 대로 상한 뒤였다. 한차 절정을 향하던 사냥은 일시에 흐지부지되었고 범 몰이라도 나설 기세였던 조무래기 몰이꾼들도 아쉬운 빛을 감추지 못한 채로 돌아서는 무리의 꽁무니를 따랐다. 돌아가는 길에 사마와 모대는 말 머리를 나란히 했다.
-살을 쏘는 것은 네가 나보다 낫지만.
-네?
사마가 운을 떼는 것이 예와 달라 모대는 불안하여 되물었다.
-생활을 경영함에는 어떻겠느냐.
-무슨……
-이른바 정치에 있어도 네가 낫보다 낫겠느냐.
모대는 손사래를 쳤다.
-전혀요. 배워먹은 것이라곤 살 쏘고 헤엄치기가 고작인 잡류인걸요. 경영이 무엇이고 정치가 또 뭐겠습니까. 그저 토끼 잡아 가죽 얻고 고기 먹으면 족한 건데요. 멱 감다 월척이라도 낚으면 그 날의 일은 다 한 몸인데요. 유불도를 섭렵하고 사서오경에 육도삼략을 깨친 형님께 어찌 저를 비하겠습니까. 당초에 경영이니 정치니 하는 것에는 발 담글 뜻도 없어요.
-나도 그리 여긴다.
숙성한 형님도 중뿔난 구석이 있으시구나. 그저 짐승 잡기에서 지셨기로서니 이런 심술을 부리시는가. 모대는 가벼이 여기고 넘길 태세였지만 사마는 그렇지 않았다.
-헌데 아버님께선 어찌 그러셨느냐.
-네?
-어찌 네 어깨를 붙들고 그런 무거운 당부를 남기셨느냔 말이다.
-본국으로 향하실 적에 하신 말씀을 이르시는지.
사마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모대는 부러 실없이 웃었다. 형님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신다.
-그거야 제가 하도 말썽을 피우니 염려가 되시는 탓으로……
-그러셨으면 다만 몸가짐을 바로 할 것이다 이르고 마셨을 터.
받아칠 말이 궁해져 모대는 입술만 우물거렸다. 사마도 더 이르지 않았다. 적당히 마필을 재촉하면 금세 닿을 거리이건만 이날따라 말의 걸음이 유난히 더뎠다. 그 유별나게 더딘 시간동안 모대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어색한 기류를 견디느라 관자놀이에 땀방울이 돋았다. 경영이고 정치고 자시고 알게 뭐람. 아버님은 별난 말씀을 하셔서 괜히 어려운 형님을 더 어렵게 만드시는구나. 모대는 속으로 아비의 흉을 봤다.
이 일로 한참 어지러운 모대의 속을 이요가 달래줬다. 사내들은 저마다 성질이 다른데, 이것만큼은 꼭 한가지로 같죠. 군자노릇을 하시는 사마 공자님도 어쩔 수 없는 사내라 그런 속없는 말을 하시는 거예요. 그 말이 기특해서 모대는 이요를 끌어안고 연달아 입을 맞췄다.
행동이 유별난 것은 다만 사마에서 그치지 않았다. 나잇값 못하기로는 천하제일인 말대인 찬수류가 정신을 고쳐먹은 것이 그러했다. 옷고름이나 잘 여미면 다행인 그가 대뜸 말쑥한 입성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어떤 날은 갈지자였다 어떤 날은 종종걸음이었다 하던 걸음이 한단지보로 정갈해졌을 뿐더러 이제는 수염을 잘 빗기고 때때로는 서책마저 탐독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대뜸 모대의 앞에 대령하여 주워섬기는 말이었다.
-오늘부로능 지가 모대 공자님으 스승입니다.
별스런 선언을 모대는 대수롭잖게 받아쳤다.
-굳이 오늘에 이르러 그걸 밝힐 건 뭔가요. 말대인은 항시 제 스승이었지요, 암. 계집 다루는 법 알려줘, 글공부 피해 갯가로 달음박질 놓는 법 알려줘, 외밭의 서리 하는 법 알려줘, 술 마시고 아닌 척 잡아떼는 법 알려줘…… 제 아무리 와니기시〔王仁吉士〕라 한들 말대인만 한 스승이 못 될 걸요.
장난조의 답변에도 찬수류는 웃지 않았다. 이 양반이 약을 잘못 자셨나. 모대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그의 기색을 살폈다.
-고런 것도 곧잘 깨쳐 드렸습니다마는, 오늘부텀 문무에 관헌 것들을 좀 깨쳐 드리겄습니다.
모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 말대인의 입에서 문무가 웬 거야.
-왕제 전하의 명이신게 고분고분 따르능 것이 좋을 것이요.
그러면서 품에서 주섬주섬 종이 쪼가리를 꺼내 보였다. 모대는 찬수류의 가르침을 받아 문무에 정진토록 하여라. 틀림없는 아비의 달필이 맞기는 했다. 형님 어라하의 붕어하심이 종당 아버지를 미치게 만들었는가. 모대는 불효막심한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는 하고 많은 선비, 무사를 제쳐놓고 말이나 먹이는 천하의 막돼먹은 건달을 스승으로 붙일 수 있단 말인가. 미친 게 아니라면 아예 내놓은 자식으로 여기겠단 천명이 아닌가. 저를 바라보는 모대의 복잡한 표정에서 말대인은 그 심산을 능히 짐작해냈다.
-저 작것이 선상질을 하믄 얼매나 할 줄 안다고 나서는고 하며 속으로 숭을 보는 게지라?
들켜버린 속을 뻔뻔한 표정으로 감춰보았지만 이 술수 역시 찬수류에게서 배워먹은 것이라 모대는 들킬 수밖에 없었다. 찬수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모대를 보더니 커흠흠 헛기침을 하며 그의 터전이자 직장인 목장으로 모대를 이끌었다. 모대는 여전히 미덥지 못하다는 눈초리였다. 목장에 다다른 찬수류는 자신이 거하는 오두막에서 검 하나를 두 손으로 받치고 나왔다. 칼집은 투박할지언정 그가 검을 빼드니 환한 검광이 눈부셨다. 버석한 지푸라기와 고약한 두엄더미로 가득한 목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찬수류는 홍조까지 띠어가며 웅변했다.
-요것이 찬씨 전가의 보검이란게요. 씨퍼런 검광만 비쳐도 호랭이가 오줌을 찔찔 싸지르구 암만 딴딴헌 무쇠래두 두부모냥 숭덩숭덩 써는 천하의 명검.
모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체했다.
-그걸로 뭘 어쩌시려고요.
찬수류는 눈을 찡긋하더니 칼자루를 느슨하게 쥐었다. 그러더니 보폭을 벌리고 목을 쭉 뺀 채 검무를 추었다. 어깨의 곡선은 강물 흐르듯 들썩였고 표정은 우는 듯 웃었다. 곧게 내지르고 에둘러 곡선으로 휘둘렀다. 가락이 없어도 찬수류의 춤에는 흥이 실렸다. 입을 헤벌리고 그의 솜씨를 감상하던 모대의 목덜미에 칼을 겨누는 것으로 찬수류는 놀라운 춤판의 종지부를 찍었다.
-솜씨가 쪼까 괜찮지라?
모대는 움찔하며 주춤주춤 뒷걸음 쳤다.
-언제 이런 걸 배웠데요.
찬수류는 칼을 거두고 거들먹거리는 투로 답했다.
-왕제 전하께서 저 중원의 남조로부텀 정로장군 좌현왕에 제수되어 나라의 병마를 거느린 것은 아시지라.
모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막하서 백제 으뜸으 철기를 선봉서 이끌던 백전용장이 바로 이몸, 찬수류 되시겄습니다.
-말대인이 관작을 받았단 소린 못 들었는데.
미심쩍은 눈초리에 찬수류는 서둘러 자기변호에 나섰다.
-어흠흠, 전장에서넌 일품이품 벼슬이 오히려 독이 되는 법이요. 칼이랑 활이랑 있음 고만인 것을……
-좋아요. 무에 솜씨가 있는 건 알겠는데 내 글공부 시켜줄 만한 감인지는 어떻게 알죠.
그 말에 찬수류는 코웃음부터 쳤다.
-헛참, 요 왕부서 멍청이 중의 쌍멍청이로 소문이 파다헌 모대 공자님얼 갈치는디 먼 증거씩이나 필요하다요. 잔나비 궁둥짝 뻘건 것을 꼭 들여다봐야 알겄어라.
모대는 기찬 웃음을 지었으나 말이야 옳은지라 받아칠 말을 궁리하다 종당 찬수류에게 패배를 선언하고 그를 스승으로 떠받들기로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순순히 머리를 숙이는 것은 모대의 성정에 어긋나는 일이라 괜히 딴죽을 한번 걸었다.
-근데 아버님께선 하필 말대인을 제 스승으로 붙였을까요.
찬수류는 한껏 거들먹거리며 답했다.
-앞으로넌 지가 공자의 싸부잉게 질의가 있으시거던 양해를 구허고 말씀허시오. 전하께서 지를 공자님 싸부로 붙인 까닭은 차차 알게 될 것이고.
본전도 못 찾은 모대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돌아앉았다.
5
백제의 어라하 자리는 경사에서 모도로 옮겨갔다. 왕도 또한 한성에서 곰나루로 물러났다. 욱리하를 품었던 왕도는 이제 굽이굽이 흐르는 백강을 임했다. 널찍한 개활지를 저마다 차지하던 귀족들의 저택들은 좁다란 곰나루 내성에 빽빽하게 들어섰다. 교군꾼 여덟이 들쳐 메는 가마도 대로란 것이 없는 곰나루에선 언감생심이었다. 오르막 내리막이 연해 있는 터라 장사치들도 달구지를 버리고 등짐을 짊어졌다. 그렇잖아도 붐비는 소도시에 왕도의 수다한 치들이 굴러들어오니 저자는 부랑자들이 아무렇게 싸지른 똥오줌 냄새가 진동하고 걸핏하면 구도와 신도의 백성들이 얽혀 싸우는 소리로 북새통을 이뤘다. 모자란 양식에 배곯는 이들이 많아졌다. 민심이 사나워졌다. 가뜩이나 힘이 쇠한 어라하가 그들을 다스리는 데 애를 먹었다.
-이런 촌에서는 돼지도 비썩 말라 살이 없구먼. 푸석푸석해서 씹는 맛이 없고 국을 끓여도 밋밋하고 구수하질 않으니…… 이런 난리통에 먹는 재미라도 없음 무슨 낙으로 산담.
해구는 젓가락으로 고깃국을 뒤적이다 뼛성을 내며 관두었다. 그는 모든 것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새로 장만한 저택은 신도에서 가장 쓸 만하다는 와가였지만 해봐야 한성 본가의 반의반도 안 되었다. 커다란 몸집에 좁아진 저택은 해구의 심사를 건드렸다. 해구는 먹던 고깃국을 저만치 치웠다. 육중한 살집에 먹은 것이 적으니 괜히 짜증이 동했다.
-이럴 때일수록 힘을 내십시오. 나라의 운명이 대인의 손에 들려있으니.
해구의 푸념을 마주앉은 자가 여유롭게 받아주었다. 눈매가 날카로운 이였다. 해구의 부한 몸집에도 밀리지 않는 체구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진한 검은 빛의 수염은 팔자로 흘러내리고 그 밑으로 꾹 다문 입술은 듬직했다. 아래로 쏠린 좁은 콧방울은 빈틈없는 성정의 표상이었고 심연처럼 깊은 동자는 귀모를 품었다. 이름 저근, 저 남쪽 마한 잔족의 토호 출신으로 남당에 중용되기는 그른 성분이었지만 남다른 무용과 지모로 해씨에 발탁되어 해구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있었다. 진씨 일문에서 한껏 뻐기는 것이 힘에서는 관정이었고 꾀에서는 조미걸취였는데, 해씨에서는 그들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관정의 힘과 조미걸취의 꾀를 합쳐놓은 것이 바로 저근이었으므로. 지금껏 부동의 세도가로 군림해온 것은 든든한 저근의 보좌도 단단히 한몫했다. 이리 재고 저리 재는 해구의 품성에 있어, 쾌도난마로 내지르는 저근의 과단성은 꼭 들어맞는 처방이었다. 쾌도난마에 더하여 저근은 출장입상이라, 그가 팔 척의 극을 틀어쥐고 말을 내몰아 동병하면 말갈의 족속과 가야의 잔병들이 똥오줌을 싸질렀다. 남당에 나서 이러저러하시라 아뢰는 말들은 흉포한 백성들을 다스리고 물산을 넉넉하도록 했다. 그러하니 유난히 혈통이며 출신을 따지고 들기 좋아하는 해구가 개의치 않고 가까이 두었다. 해구가 거푸 좌평의 자리를 권했지만 저근은 극구 사양하며 한사코 4등 덕솔의 위에 머무르기를 원하니, 해구가 더욱 기꺼워했다.
-나라의 운용은 어라하의 몫. 어찌 이 미천한 손에 나라의 운명이 들렸단 말인가. 나는 가문을 꾸리는 것만으로도 벅차.
-어라하요. 이 나라에 어라하가 있던가요.
역적죄로 다스려야 마땅할 말을 해놓고 저근은 실실 웃음을 머금었다.
-한성이 고구려의 손에 넘어가면서 어라하의 위엄과 권력은 모조리 없어졌습니다. 붕어하신 어라하께서 적장이 용안에 세 번 침을 뱉는 욕을 당하고 목이 잘리셨지요. 어라하의 신실한 근왕병 오천도 그와 운명을 함께하였습니다. 망선대에 나부끼던 황룡기는 거련의 방석으로 쓰인다죠.
-어허, 말씀을 가려하실 것을.
저근은 그치지 않았다.
-어라하의 밑을 기며 그가 던져주는 권력의 부스러기를 좀먹던 한성의 세도가들도 함께 몰락했습니다. 어라하라는 차양이 사라진 탓으로 곰나루의 강렬한 태양이 저들에게 버겁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태자께오서는 영명하시나 유약하신지라 난세를 타개하기는 어렵지요.
해구는 이제 부러 나무라는 말도 없이 무거운 신음소리를 내며 가만히 저근의 말을 들었다.
-그렇다고 남부의 촌놈들이 무주공산이 된 백제의 권좌를 감히 차지할 수 있을까요. 사씨와 목씨, 백씨, 연씨 올망졸망한 그들이요. 배포가 작도 힘도 작은 그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저근은 시커먼 눈동자를 빛냈다.
-그렇다면 누가 백제의 주인입니까.
해구는 침을 삼켰다.
-대인이 아닐까요.
해구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저는 고구려의 난리가 있을 적에 해씨의 가병들을 온전히 남으로 빼돌렸습니다. 작살을 던져도 뚫리지 않는 명광개를 갖춘 오천의 정병을 비롯하여 일만오천 여 해씨의 가병들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곰나루에 안착했습니다. 그에 반해 한성의 귀족들은 허둥거리다가, 혹은 분수 넘은 충심의 발로로 고구려와의 전투에 임하느라 가병들을 반이나 넘게 까먹고 말았죠. 해씨를 뺀 다른 귀족들의 형편없는 면면을 보십시오. 기껏 진씨의 칠천 여가 고작. 목씨 삼천, 사씨 이천, 백씨 천오백, 연씨 천. 어떻습니까. 병관부와 위사부를 해씨 일문이 차지했으나 관군도 온전히 해씨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어라하라고 별 수 있나요. 기껏해야 부여씨 직할의 오천이 고작인 것을.
저근은 정확했다. 거련의 병마가 한성을 휩쓰는 통에 숱한 귀족들은 그 세를 잃었다. 피난길에 올라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마당에 가솔에 하물며 가병들임에야. 상전을 잃은 가병들은 우물거리다가 이젠 있는지도 모르는 고향으로 향하거나, 고구려의 눈먼 칼에 맞아 지리멸렬하고 말았다. 진씨 같은 명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만 여를 헤아리던 진씨의 가병은 곰나루에 이르러 칠천으로 줄었다. 그나마 한성이 아닌 경기에 터를 잡아둔 덕으로 손실이 그나마 덜했다. 여타의 한성귀족들은 갈도, 교군꾼들이나 붙잡아뒀으면 다행인 판국이었다. 그에 빈해 해씨는 한성의 제일귀족임에도 그 세를 온전히 보존했다. 저근이 발 빠르게 대응한 탓이었다. 이러저러한 귀족들은 물론 왕가 부여씨조차 해씨에 미치지 못하게 됐다. 야경꾼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왕의 군대에 비해 검은 갑주의 윤택을 뽐내며 행진하는, 해씨 가병 중에서도 정예로 꼽히는 흑개사(黑鎧師)의 위용은 눈부셨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해구는 저근의 말이 아주 까닭 없는 것은 아니라고 여기게 됐다. 그러다 스치는 다른 생각으로 낯빛을 흐렸다.
-내가 백제의 권좌를 틀어쥐었다고 여겨도 무리는 없지. 그 자를 빼면.
저근은 그 속내를 능히 짐작하고 미소를 지었다.
-왕제 곤지를 이르심이겠지요.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해구는 진저리를 쳤다. 지끈지끈 올라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왜에서 귀환해 흐트러진 국기를 다잡고 남당을 휘어잡는 왕제 곤지는 눈엣가시였다. 경사의 재위에도 그랬다. 달콤한 언변과 속없는 아첨으로 경사의 눈을 가리고 국정을 농단하려 든 해구를 가로막은 것은 항상 곤지였다. 나라 안팎의 병마를 거느리고 왕자를 보위하니 세간에서 공공연히 이르기로 곤지를 위시한 왕당은 지극히 맑은 청수파이고 그것에 대적하여 나라를 좀먹는 해구 등의 귀족당은 지극히 흐리고 어두운 탁수파라 했다. 그런 곤지를 겨우 왜로 내몰았더니 다시 내신좌평으로 돌아와 해구의 속을 뒤집었다. 그 자식, 정말 까다롭고 귀찮은 놈이야. 주린 배에 먹을 것이 션찮은 마당에 곤지의 생각을 곁들이니 노기에 가까운 짜증이 솟았다.
백강은 운치가 좋았다. 강을 끼고 우뚝 솟은 절벽에, 그럴 듯한 암자를 세우고 소나무를 심는다면 화조풍월을 누리며 시를 읊기에 더없이 좋으리라. 그러한즉 놀기 좋아하는 자들의 강이요 풍류의 강이라. 백강을 안은 곰나루는 물산이 적으나, 풍류에는 한 대접 술이면 족하니 허물이 되지 않는다. 인마의 교통이 어려우나 오직 천지와 벗하는 자들에겐 더 없이 좋은 땅이다. 그래, 곰나루 너는 노는 자들의 땅이어야 한다. 모도는 난간을 붙잡고 고개를 처박았다.
-왕도는 모름지기 물산 족하고 교통 수월해야 하거늘. 어찌하여 네가 이 나라의 왕도가 되었니. 풍류의 땅으로 그쳐야만 할 것을……
머리를 짓누르는 무게가 버거워 그는 금관을 벗어던졌다. 어라하가 무어라 지껄이건 백강은 하염없이 흘렀다. 임금의 말을 듣지 않는구나. 사람만 그리하는 줄 알았더니 너도 그와 같이 매정하다. 이 땅에서 내 말 들을 자 어디 있더냐. 어라하가 홀로 토해내는 탄식이 백강으로 떠내려갔다.
-침수에 드시질 않고요.
곤지가 모도의 어깨를 짚었다. 미지근한 체온이 전해졌다. 모도는 뒤를 돌아보았다.
-숙부.
-밤에는 주무시고 낮에는 정사를 돌보십시오. 왕도의 초석입니다.
-그러면 나는 정녕 왕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곤지는 모도의 처진 어깨를 가만히 보았다.
-백성을 돌볼 힘이 내게는 없습니다. 밤에는 스스로 잠을 청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왜 왕이 됐습니까.
모도는 벗어던진 금관을 들었다.
-숙부가 대신 써줘요.
떨리는 모도의 손이 금관을 곤지의 앞으로 내밀었다.
-제발……
모도의 눈두덩에 물기가 올랐다.
-제발… 나 대신 이 끔찍한 물건을 가져요……
제발, 제발, 제발…… 모도는 같은 말만을 되뇌었다. 그는 곤지의 앞에 엎드렸다. 곤지는 가만히 있었다. 모도가 눈빛으로 애걸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흔한 위로 한 마디 건네지 않았고 함께 울지도 않았다. 숙부로서 조카를 위무하지 않았고 신하로서 임금에게 강건하시라 간하지 않았다. 제발, 제발, 제발…… 모도는 계속 부르짖다 종내 머리를 박고 짐승처럼 울었다. 한참을 울도록 곤지는 두었다. 울음소리가 끝나고 백강의 흐르는 소리가 다시 들릴 때가 돼서야 곤지가 말했다.
-다시 쓰세요. 함부로 하실 것이 아닙니다.
모도가 엎드린 채로 고개를 들어 곤지를 보았다. 곤지가 자애롭게 말했다.
-모도야, 다시 써라.
그럼에도 주저하니 곤지가 금관을 들었다. 그의 큰 손에 금관이 넉넉히 안겼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씌워주마. 다시는 벗지 마라.
금관이 다시 천천히 모도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모도는 떨었으나 곤지의 손길을 내치지 않았다. 힘진 곤지의 손이 모도의 여린 손을 붙들었다.
-산처럼 굳어라. 내 도우리라.
귀족을 대족·세가·귀문의 삼등으로 나누고 사사로이 둘 수 있는 가병의 수효를 대족은 일만, 세가는 오천, 귀문은 이천으로 한한다.
내신좌평 곤지의 선언에 남당은 술렁였다. 지금껏 왕가에서 귀족들에 간예함은 시시콜콜한 세율의 높낮이나 대외정벌에 징발할 영지 속민의 수효, 사소한 의전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의 가병을 직접 걸고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가병은 가문의 세를 상징하는 주요한 지표이자 행세도의 가장 확실한 방편. 어라하의 위세가 정점에 달했던 근초고대왕의 치세에도 가병에 관하여는 참견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왕가에서 귀족을 임의로 삼등분한다니. 해구를 비롯한 뭇 귀족들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곰나루로의 천도 이후 어라하의 금관은 송아지만큼의 값어치도 못 되게 전락했다. 유약한 어라하를 흉잡는 노골적인 유행가가 골목마다 울렸다. 헌데 그런 왕가가 귀족들을 깔아뭉개시겠다. 어불성설이었다. 백제에는 시종 어라하가 있어왔으나 시종 귀족들 또한 있어왔다. 귀족들이 어라하를 인정하는 만큼 어라하 또한 그만한 대가를 치러왔다. 그것이 오백 년의 유구한 도리이자 전통. 그것을 까부수는 헛소리를 곤지는 엄숙하게 외고 있었다.
-어라하의 뜻입니까.
해구가 좁쌀만 한 눈빛을 성좌로 향했다. 제일의 세도가답게 정치를 잘 알았다. 노련한 곤지가 아닌 유약한 어라하가 구워삶기 수월하다는 걸 간파했다.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어라하가 입술을 우물거리는 틈을 타 곤지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렇소. 어라하께서 재가하신 일이오.
-내신좌평께서 고안하시고 어라하께서 재가하셨다 이 말이로군요.
빈정거리는 투를 곤지는 점잖게 받았다.
-어라하께서 재가하셨으니 어라하의 뜻이오.
해구는 단호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라하의 굳은 뜻이오. 신하된 도리로 마땅히 받들어야할 터.
-군주가 그른 명령을 내리면 충심으로 간함이 진정한 신도. 저는 지금 명을 거두시라 간언을 드리고 있습니다.
해구는 으르렁거리며 받아친 뒤 중신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공들의 뜻은 어떠하시오. 지금 어라하의 분부가 마땅한가.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겁쟁이들! 해구는 속으로 조소했다. 그렇게 속이 알량하고 겁이 많으니 세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혹여나 나서 괜한 욕을 볼까 염려가 되는 것이지. 좀스럽다. 그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니 해구와 한패인 저근이 나서서 말했다.
-어라하께서 귀족을 삼등으로 나누고 가병의 수를 한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삼가 아뢰옵건대 어라하께서는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가병은 귀족을 견실하게 합니다. 귀족이 견실해야 나라의 기강이 서고 어라하를 성심으로 보필할 수 있을 것인즉 이를 헤아리소서.
말 한번 잘한다. 해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근이 말문을 트니 그제야 왁자하게 저마다 아니 되옵니다,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명을 거두소서 떠들어댔다. 어라하와 곤지는 쏟아지는 항변을 묵묵히 들었다. 소리가 잦아들자 곤지가 나섰다. 들불처럼 이는 반발에도 곤지는 태연했다.
-이보오, 달솔 사약사 공.
부르는 말에 사씨의 가주 사약사가 고개를 숙이며 알은체를 했다.
명광개
신소도국 = 큰소도 (태안 일대)
해례곤 = 불중후 - 보성군 대포리
목간나 = 면중후 - 광주
저근 = 면중왕 -> 도한왕 - 고흥
찬수류 = 벽중왕 - 순창
부여고 = 팔중후 - 나주
사법명 = 매라왕 - 장흥
부야고古 = 아착왕 - 무안 압해
고달 양무 회매
- 2014/10/31 15:14
- urahanovel.egloos.com/4154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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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간에 묶인 말들은 길게 울었다. 눈을 홉뜨고 콧구멍으로 더운 김을 뿜었다. 말들은 주인들과 오래 더불었다. 오로지 동물만의 느낌으로 말들은 주인들의 불행을 눈치 챘다. 발굽들이 좀체 가만있지 못하였다. 왕의 유순한 가라말도 귀를 세우고 성마른 호흡을 뱉었다. 야들이 왜 이런디야…… 오래 말들을 부려온 늙은 목자는 뻣뻣한 수염을 쓸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보름달이 중천에 걸리면 축생들은 음기가 과히 돋아 지랄병이 걸린 것처럼 날뛰기도 했지만 이날은 초하루였다. 잘라낸 손톱 같은 삭월이 구름 속에서 희미하게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헛 참…… 목자는 속을 메우는 불안증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한 삽 가득 퍼 올린 말똥을 구사 옆의 두엄더미에 보탰다. 노인의 직감은 축생만큼이나 적확한 법이나 필부의 분수로는 하던 업을 이어하는 것밖에 별 다른 터수가 없었다. 삭은 허리뼈로 전해오는 통증에 목자는 삽을 내동댕이치고 아구구, 신음을 토했다. 별들은 먹구름에 가렸고 마포촌에는 밤안개가 자욱했다.
-나는 사슴을 잡으러 왔는데.
모대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볐다. 근자에 왕의 침수에 훼방을 놓는 무례는 받아본 일이 없었다. 십 년 전의 큰 전쟁이 있을 적에 급한 전령이 그랬던 것이 전부였다. 그의 앞에 백가가 서있었다. 칼을 든 채였다. 침대에 앉아 모대는 칼을 쥔 백가를 덤덤히 올려다보았다.
-너는 나를 잡으러 왔구나.
모대의 눈이 백가의 눈을 보았다. 너의 눈이 떨고 있구나. 모대는 엷게 웃었다. 벌써 스무 해도 더 된 일이다. 그때도 그랬다. 스무 해를 통하여 그 버릇은 지독히 살아남았다. 밤중에도 시퍼런 빛을 발하는 백가의 칼을 모대는 애써 외면했다. 그때의 천진한 시절이 좋았어. 그때 우리의 인연은 순박하였다. 권력에 다치고 술수에 얽히는 바가 없었다. 싫으면 울었고 좋으면 웃었다. 속내가 없는 한 겹짜리 인연이었다. 그토록 정직하였거늘. 나는 그때가 그립다. 너도 그럴 터.
그날의 백가도 떨었다. 그러니까 모대와 백가가 처음 눈을 마주한 날이었다. 그들이 왜국에서 자라던 시절이었다. 모대는 고귀한 왕가의 혈맥을 지녔음에도 짓궂은 성정이었고, 백가는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임에도 칼의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빛이 떨렸다. 뼈가 무른 나이치고는 장사 셈평에 밝던 백가는 예하의 상단을 거느리고 왜 장사치들과의 흥정에 맛을 들였다. 그날도 백가는 달구지에 이것저것을 싣고 장도에 올랐다. 백가는 달구지를 몰아 좁은 샛길로 향했다. 번듯한 대로가 있음에도 그리 한 것은 촌각에도 틀어지는 것이 상도임을 백가가 익히 알고 있는 탓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또래를 웃도는 총기를 지닌 백가라지만 굉장한 천둥벌거숭이로 동리에 악명을 떨치던 모대 패거리의 급습을 예상하지는 못하였다. 모대 일당은 일대의 선량한 백성들에게 괘씸한 장난질을 일삼는 것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좌판에 배가 갈라진 채로 늘어선 생선들에 모래를 끼얹어 못 쓰는 물건으로 만든다든지 홀아비로 십 수 해를 견뎌온 불쌍하고 늙은 어부가 밤새 짜놓은 그물을 죄다 망쳐놓는다든지 음전한 숫처녀가 밥을 짓는 가마솥에다 사냥으로 잡은 수노루의 우람한 양물을 감춰놓는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백성들이 모대 일당을 잡아 족치려는 궁리를 한다든가 하다못해 관에다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지 못하는 것은, 모대가 다름 아닌 구다라 대왕의 조카인데다가 구다라 대왕을 대리하여 왜에 체류하는 왕제 곤지의 혈육인 탓이었다. 왕제 곤지는 이 나라의 대왕도 스승으로 떠받드는 당대의 현인이자 항용 백성들의 심신을 살피는 당대의 군자였다. 모대가 제일가는 혈통의 소유자인데다 저들이 떠받드는 왕제 곤지의 소생인 탓으로 백성들은 감히 모대의 흉허물을 잡지 못하고 속병만 앓는 것이었다. 그런 모대가 백가의 달구지를 습격하였다. 모대를 따르는 왜의 코흘리개들은 저들이 구다라 대왕의 근왕병이라도 되는 양 서투르게 깎은 목검을 받쳐 잡고 기세 좋게 돌진했다. 그러던 그들이 아차하며 우뚝 걸음을 멈춘 것은 소달구지의 좌우를 지키고 선 장골들을 보고서였다. 장골들은 코웃음 치며 목검의 앞에 진검을 빼들었다. 본시 출신이 저자의 사나운 잡류배들인 그들이 조무래기 몇몇의 혼을 빼놓는 것은 손쉬웠다. 더불어 구다라의 백씨 일가는 왜왕가에 지물을 독점 납품하는 세 있는 집안이었으므로 관의 눈치를 볼 계제도 아니었다. 애당초 왕제 곤지의 위명으로 겁박하여 주전부리할 감이나 타낼 셈속이었던 조무래기들은 제 목줄을 결딴낼지도 모르는 칼날 앞에서 혼비백산했다. 모대의 유일한 방패막이인 왕제 곤지의 이름 세도 외지 출신의 이들에게는 숫제 헛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왕제 곤지의 소생이다. 모대는 거푸 강변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식은 조소.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은 조무래기들을 구원한 것은 다름 아닌 백가였다. 잘 벼려 퍼런빛을 발하는 칼을 백가의 하얀 손이 막았다. 모대는 그 손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떨리는 눈도 보았다. 이제 우리가 저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빛이 떨리는가. 장골들의 칼날에 목을 움츠리면서도 모대는 그것이 의아했다.
모대는 길게 숨을 쉬었다. 추운 날이므로 뽀얀 김이 숨결과 섞여 나왔다. 백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이 떨릴 뿐이었다. 칼을 쥔 오른손은 유난히 떨림이 심하였다. 모대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롱에 불을 붙였다. 불이 붙자 모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백가의 몸을 덮었다. 백가의 몸이 그의 마음처럼 그늘졌다. 모대도 백가처럼 말하지 않았다. 다만 예의 덤덤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딱하구나, 백가야. 또한 내 신세가 딱하다. 무엇이 우리를 이 지경으로 내몰았느냐. 모대는 속으로 여겼다.
-눈이 많이 오는 바람에 사슴을 놓쳤구나.
백가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모대는 멋쩍게 웃었다. 날이 춥다. 너는 괜찮으냐. 살갑게도 물어봤지만 역시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추울 것인데…… 모대는 스스로 말을 거두었다. 모대의 눈은 백가의 눈을 보았다. 그것에서 복잡한 심사를 읽었고, 그것보다도 복잡하게 얽혀있는 역사를 읽었다. 모대와 백가의 역사. 고난을 해쳐내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하고 얼싸안기도 하고. 이따금은 패배하고 좌절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 모든 것을 같이. 오랜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백가의 눈에서 읽어지는 역사를 모대는 쉬 떨쳐낼 수가 없었다.
-너도 나를 놓칠 수는, 없는지.
모대는 말을 해놓고 가슴이 철렁하였다. 백가의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올지 모른다. 두렵다. 그의 대답을 바로 듣기 어렵다. 그래서 다른 말을 했다.
-그 날의 너도 오늘의 너처럼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백가는 모대 일당을 곱게 돌려보냈다. 장골들이 까만 점으로 소멸할 때까지 멀리 달음박질을 쳐서야 패거리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쉴 수 있었다. 머리통이 굵어보아야 열서넛이 고작인 그들에게는 고약한 경험이었다. 그중의 막내는 얼굴이 허옇게 질려 물똥을 싸질렀다. 코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에도 그의 바로 손위가 심하게 퉁바리를 놓지 못하는 것은 기실 저 또한 오줌을 찔끔 지린 터였다. 모대는 내색 않고 헛기침을 하다가 거처로 돌아가 슬그머니 속곳을 갈아입었다. 유모가 흉을 볼까 한사코 스스로 빨래를 자처하였다. 그걸 보고 유모는 모대가 어른스러워졌다며 한참을 추켜세웠다. 잠자리에 들어서는 저의 목줄을 향해 번뜩이던 칼날을 떠올리며 이불을 이마 끝까지 끌어올렸다. 잠결에 오줌을 지릴까 측간에 들러 단단히 준비를 해두었다.
떠들썩한 앞뜰의 소리에 모대는 잠에서 깼다. 모대의 앞뜰의 소란보다도 더 시끄러운 악을 써서 단잠을 깨운 괘씸한 소란을 진압할 작정이었다. 필시 말대인〔馬大人〕 찬수류가 유모의 풍만한 젖통을 희롱하다 된통 야단을 맞는 일이리라. 그것이 아니라면 말대인이 제공자(諸公子), 그러니까 왕제 곤지의 혈육들을 충돌질하여 갯가로 고기잡이를 나가다가 제공자의 글선생에게 적발 되어 호된 꾸중을 듣는 일이리라. 또 그것이 아니더라도 아무튼 말대인이 연루된 사건이 벌어진 것만큼은 분명하리라, 모대는 여겼다. 찬수류가 말대인이란 별호로 불리게 된 경위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가 곤지의 수하로 말들을 찌우고 길들이는 책무를 수행하는 까닭일 수도 있고, 그가 옛 말한〔馬韓〕의 수다한 소국들 중 하나를 고향으로 삼는 까닭일 수도 있었다. 말 뒤에 대인이란 호칭이 붙는 것은 그가 여타의 평범한 목자들과는 다른 면모가 있는 탓이었다. 사실 대인보다는 기인(奇人)이라 이름이 맞을 것인데, 예를 숭상하는 구다라의 유순한 사람들이 기왕지사 기인보다는 대인이 듣기에 낫다며 말대인을 찬수류의 별호로 삼은 것이었다. 앞서 밝힌 대로 유모를 희롱한다든지 제공자를 충동질하는 것은 물론, 성미에 차지 않는 일이면 제아무리 그의 주인인 곤지라도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피할 길이 없었다. 북 치고 피리 불며 길가를 떠도는 놀이패가 지나가기라도 하는 날엔 그들을 따라나서 날이 으슥해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건달들과의 드잡이에서는 패왕 항우보다도 맹렬했고, 주사청루에서 한바탕 질펀하게 엉키고 한해 꼬박 쌓아둔 목돈을 그날의 해웃값으로 탕진해버리기도 하였다. 그가 기르는 수십 두의 말들에게 저마다 이름을 붙이고 어쩌다 폐사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상복을 입고 밤새도록 곡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대인보다는 기인의 부름이 가당한 것이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수탉이 홰를 치는 아침부터 앞뜰이 소란한 것은 필시 말대인이 벌인 일이리라 모대가 여기는 것도 아주 까닭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대가 살펴보니 말대인도 구경꾼의 주제로 먼발치에서 까치발을 세우고 소란의 까닭을 살피느라 혼이 빠져있었다. 모대도 그와 같이 하였다. 풍경을 살피던 모대의 눈에 힘이 들어간 것은 전날 보았던, 눈빛이 떨리던 백가가 시야에 들어오고서였다. 겨우 삭였던 부끄러운 두려움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놈이 대체 무슨 수작인 게야. 모대의 입속이 말랐다. 불안한 근심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백가에게 무어라 듣던 곤지는 모대의 처소를 향하여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대는 한달음에 곤지의 앞에 대령했다. 곤지의 자비심은 바다처럼 깊으나 한번 노기를 띠면 역시 바다처럼 세차게 휘몰아치는 까닭이었다. 공손히 엎드린 모대의 등 위로 준엄한 곤지의 음성이 쏟아졌다.
-이놈, 성정을 고쳐라 그리 일렀거늘.
애써 분을 삭이는 아비의 음성에 모대는 가만히 떨었다.
-어찌하여 이리도 깨침이 없느냐.
모대는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몸을 웅크리고 있자니 심장의 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백씨의 자제가 아뢰는 말이 틀림없는 사실이렷다.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면 도리어 아비의 화를 돋운다는 것을 모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한즉 모대는 재삼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 아비의 심문에 긍정했다.
-고얀.
곤지는 노기를 말로써 발하는 법이 없었다. 고얀. 아무리 화가 끓어도 그 두 글자로 그쳤다. 그는 아들의 잘못을 단죄할 수단을 잠시 고민하다 결론을 내놓았다.
-너는 오늘부터 달포 간 왕가의 권속이 아니다. 다만 백씨의 사환꾼으로 일하며 네 죗값을 치러라.
-하지만, 아버님!
곤지는 눈을 부라리는 것으로 모대의 반론을 제압했다. 그로부터 달포 간 모대는 백가의 사환꾼으로 살았다. 어깨를 늘이고 백가의 뒤를 따르는 모대를 향해 말대인이 킬킬거렸다.
-슬플 것도, 노할 것도 없어라. 다 크게 쓰일 일이 있겄제요!
-말대인은 말이나 돌봐!
-그럼은요, 그럼은요.
말대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구간으로 돌아갔다.
모대의 시선은 여전히 백가의 눈에 머물렀다. 너는 칼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네 일생을 통하여 관철돼온 명확한 것. 그럼에도, 그 두려움을 견디고서 이렇게까지 한단 말이냐. 모대의 눈두덩에 물기가 차올랐다. 이토록 나의 죄가 크 >>
- 2014/10/01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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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나루
*왜국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라고 불렀다.
*‘어라하’와 ‘건길지’ 모두 백제의 임금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이다. 전자의 경우 왕족이나 귀족들 사이에서, 후자는 백성들 사이에서 쓰이는 호칭이었다.
*아직도 논란이 많은 이 시기의 백제-북위 간 전쟁 기술은 소설적 흥미를 위하여 공간적 배경을 요서지역으로 비정하였으며 백제가 요서 지역 두 개의 군에 진출하였다고 설정하였다. 많은 견해 중 하나를 채택한 것이며,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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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간에 묶인 말들은 길게 울었다.
눈을 홉뜨고 콧구멍으로 더운 김을 내뿜었다. 말들은 주인들과 오래 살았다. 오로지 동물만이 가지는 느낌으로 그것들은 주인들의 불행을 눈치 챘다. 발굽들이 좀체 가만있지 못하였다. 왕의 유순한 가라말도 귀를 세우고 성마른 호흡을 뱉었다. 야들이 왜 이런디야. 오래 말들을 부린 늙은 목자는 뻣뻣한 수염을 쓸었다. 보름달이 높이 뜨면 축생들은 음기가 과히 돋아 가끔 지랄병이 걸린 것처럼 날뛰기도 했지만 이 날은 초하루였다. 잘라낸 손톱 같은 삭월만 구름 속에서 희미하게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헛 참……. 목자는 속을 메우는 불안증으로 한숨을 뱉었다. 그러다가 한 삽 가득 퍼 올린 말똥을 구사 옆의 두엄더미에 보태었다. 노인의 직감은 축생의 것처럼 적확한 법이나 필부로서는 하던 업을 지속하는 것밖에 별 다른 터수가 없었다. 삭은 허리뼈로 찌르르 전해오는 통증에 목자는 삽을 내동댕이치고 아구구, 신음을 토했다. 별들이 먹구름에 가렸고 마포촌에는 밤안개가 자욱했다.
-나는 사슴을 잡으러 왔는데.
모대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볐다.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다. 백가는 서있었다. 모대는 침대에 앉아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모대의 눈이 백가의 눈을 보았다. 떨고 있구나. 모대는 엷게 웃었다. 너는 명석하지. 그러나 겁이 많은 위인이야. 나는 너를 안다. 너는, 떨고 있구나.
그날도 그랬다. 그러니까 모대와 백가가 처음 눈을 마주한 날, 백가의 눈이 떨고 있었다. 그들이 왜국에서 자라던 시절이었다. 모대는 고귀한 부여 가의 혈맥을 지녔음에도 짓궂었고, 백가는 곰나루의 새로이 발흥하는 귀족의 자제임에도 떳떳한 성정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뼈가 무른 것치고는 장사 셈평에 밝았던 백가는 곧잘 예하의 상단을 거느리고 왜 장사치들과의 흥정에 맛을 들였다. 그날 백가는 달구지에 종이며 비단이며 그득히 싣고 그것들을 쌀과 어물로 바꾸어오라는 백 씨의 가주(家主)이자 그의 아비인 백문으로부터의 주문을 따르고 있었다. 백문은 값을 톡톡히 쳐서 오란 말을 더하지 않았는데, 구태여 하지 않아도 백가는 항시 대단한 이문을 남겨오는 탓이었다.
백가는 달구지를 몰아 좁은 샛길로 향하였다. 대로를 택하지 않은 것은 장사에 있어 시간이라는 것이 중한지라 한 각이라도 아껴보려는 기특한 심산에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또래를 웃도는 총기가 있는 백가라지만 굉장한 천둥벌거숭이로 동리에 악명을 떨치던 모대 패거리의 급습을 예상하지는 못하였다. 모대 일당은 일대의 선량한 백성들에게 괘씸한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그 이름세가 높았다. 좌판에서 비린내를 훅 풍기는 생선들에 모래를 한 바구니 쏟아버린다든가 홀아비로 십 수 년을 견디어온 불쌍하고 늙은 어부가 밤새 짜놓은 그물을 죄다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든가 얌전한 숫처녀가 밥을 짓는 가마솥에다 잡은 수컷 노루의 우람한 양물을 감춘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감히 이들이 모대 일당을 잡아 족치려는 궁리를 한다든가 하다못해 관에다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지 못하는 것은, 모대가 다름 아닌 구다라〔百濟〕 대왕의 조카인데다가 구다라 대왕을 대리하여 이 일대에 문화를 전하러 온 왕제 곤지의 혈육인 탓이었다. 왕제 곤지는 이 나라의 대왕도 스승으로 떠받들 만큼 끝 모를 지혜를 지닌 당대의 현인이자 흉년에는 구휼하고 풍년에는 잔치하느라 사철 곳간의 쌀을 실어 나르는, 그런 까닭으로 백성들이 제 임금보다도 열렬히 숭앙하는 당대의 군자였다. 모대가 제일가는 혈통의 소유자인데다가 저들이 떠받드는 왕제 곤지의 소생인 탓으로 백성들은 감히 모대의 흉조차도 보지 못하고 끙끙 속병만 앓는 것이었다.
그런 모대가 백가의 달구지를 습격하였다. 모대를 따르는 왜의 코흘리개들은 저들이 구다라 대왕의 근왕병이라도 되는 양 한껏 어깨를 펴고 서투르게 깎은 목검을 휘둘렀다. 기세 좋게 돌격하던 그들이 아차 하며 우뚝 걸음을 멈춘 것은 소달구지의 좌우를 지키고 있는 장골들을 보고서였다. 장골들은 코웃음 쳤다. 본시 출신이 저자의 사나운 잡류배들인 그들이 조무래기 몇몇을 베어 넘기는 것에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더불어 구다라의 백 씨 일가는 왜왕가에 지물을 독점 납품하는 세 있는 집안이었으므로 관의 눈치를 볼 계제도 아니었다. 이들이 근방에 인연을 두지 않은 외지인인 탓으로 모대를 비호하는 왕제 곤지의 명성도 순 헛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왕제 곤지의 소생이다! 모대는 거푸 강변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식은 조소. 식은땀을 흘리는 조무래기들의 기골을 해치려는 장골들을 막아선 것은 백가였다. 잘 벼린 칼을 막는 백가의 하얀 손을 모대는 보았다. 더불어, 그의 떨리는 눈도 보았다. 이제 우리가 저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하여 저 자의 눈이 떨리는가. 다 죽게 된 처지에도 모대는 그것이 의아했다.
모대는 길게 숨을 쉬었다. 추운 날이므로 뽀얀 김이 뿜어졌다.
-너는 나를 잡으러 왔구나.
백가는 말하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에는 칼이 들려있었다. 칼날은 떨리고 있었다. 모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롱에 불을 붙였다. 모대의 그림자가 백가의 몸을 덮었다. 백가의 몸이 그의 마음처럼 그늘졌다.
-눈이 많이 와서 사슴을 놓치고 말았다.
모대는 걸어놓았던 외투를 걸쳤다. 날이 춥다. 너는 괜찮으냐. 살갑게 묻는 말에도 백가는 말하지 않았다. 추울 것인데. 모대는 제가 했던 말을 스스로 거두었다. 모대의 눈은 백가의 눈을 보았다. 그것에서 복잡한 심사를 읽었고, 그것보다도 복잡하게 얽혀있는 역사를 읽었다. 모대와 백가의 역사. 고난을 해쳐내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하고 얼싸안기도 하고. 이따금은 패배하고 좌절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 모든 것을 같이. 오랜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백가의 눈에서 읽어지는 역사를 모대는 쉬 떨쳐낼 수가 없었다.
-너도 나를 놓칠 수는, 없는지.
모대는 말을 해놓고 가슴이 철렁하였다. 백가의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올지 모른다. 두렵다. 그의 대답을 바로 듣기 어렵다. 그래서 다른 말을 했다.
-그 날의 너도 오늘의 너처럼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백가는 떨리는 목소리로 모대 일당을 곱게 돌려보냈다. 장골들이 까만 점으로 소멸할 만큼 멀리 달음박질을 쳐서야 패거리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쉴 수 있었다. 머리통이 굵어봐야 열두서넛이 고작인 그들에게는 고약한 경험이었다. 막내는 얼굴이 허옇게 질러서 물똥을 싸질렀다. 그에게 퉁바리를 놓는 셋째도 오줌을 찔끔 지린 터라 심하게 굴지는 못하였다. 모대는 내색 않고 헛기침을 하며 거처로 돌아가 슬그머니 속곳을 갈아입었다. 유모가 흉을 볼까 한사코 스스로 빨래를 자처하였다. 잠자리에 들어서는 저의 목줄을 향해 번뜩이던 칼날을 떠올리며 이불을 이마 끝까지 끌어올렸다. 잠결에 오줌을 지릴까 측간에서 단단히 준비를 해두었다.
떠들썩한 앞뜰의 소리에 모대는 잠을 깼다. 모대는 소란보다 더 큰 악을 써서 단잠을 깨운 괘씸한 소란을 진압할 작정이었다. 필시 말대인〔馬大人〕 찬수류가 유모의 풍만한 젖통을 희롱하다가 된통 야단을 맞는 일이리라. 그것이 아니라면 말대인이 제왕자(諸王子), 그러니까 왕제 곤지의 혈육들을 충동질하여 갯가로 고기잡이를 나가려다가 제왕자의 글선생에게 적발이 되어 호된 꾸중을 듣는 일이리라. 또 그것이 아니더라도 아무튼 말대인이 연루된 사건이 벌어진 것이 분명하리라, 모대는 여겼다. 찬수류가 말대인으로 불리게 된 경위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가 왕제 곤지의 휘하에서 군마를 찌우고 단련시키는 책무를 수행하는 까닭일 수도 있고, 그가 옛 말한〔馬韓〕의 수다한 소국들 중 하나를 고향으로 삼는 까닭일 수도 있었다. 말 뒤에 대인이라는 호칭이 붙는 것은 그가 여타의 평범한 목자들과는 다른 면모가 있는 탓이었다. 사실 대인보다는 기인(奇人)이라 이름이 맞는 것인데, 예를 숭상하는 구다라의 유순한 사람들이 기왕지사 말기인보다는 듯기 좋은 말대인을 찬수류의 별호로 삼은 것이었다. 앞서 밝히었던 유모를 희롱한다든지 제왕자를 충동질하는 것은 물론, 마뜩찮은 일이 있으면 제아무리 왕제 곤지라도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피할 길이 없었다.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길가를 떠도는 놀이패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그들을 따라나서 날이 으슥해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잡류배들과의 드잡이에서는 맹렬했고, 주사청루에서 한바탕 질펀하게 엉키고 한 해 꼬박 쌓아둔 목돈을 그날의 해웃값으로 탕진해버리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말대인 찬수류의 기행은 하나하나 열거하기 힘들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수탉이 홰를 치는 아침부터 앞뜰이 소란한 것은 필시 말대인이 벌일 일이라 모대가 여기는 것도 아주 까닭 없는 추측은 아닌 것이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말대인은 주역이 아닌 방관자였다. 그는 마구간이 있는 먼발치서 까치발을 세우고 앞뜰을 향해 고개를 기웃거렸다. 앞뜰에는 왕제 곤지가 나서서 윤기 도는 기다란 턱수염을 쓸고 있었다. 모대는 몸을 슬쩍 숨기고 앞뜰을 주시했다. 풍경을 살피던 모대의 눈에 힘이 들어간 건 전날 보았던, 눈빛이 떨리던 백가가 시야에 들어오고서였다. 겨우 삭였던 부끄러운 두려움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놈이 대체 무슨 수작인 게야. 모대의 입속이 말랐다. 불안한 근심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백가에게 무어라 듣던 곤지는 모대의 처소를 향하여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대는 한달음에 곤지의 앞에 대령했다. 곤지의 자비심은 바다처럼 깊으나 한번 노기를 띠면 역시 바다처럼 세차게 휘몰아치는 까닭이었다. 공손히 엎드린 모대의 등 위로 준엄한 곤지의 음성이 쏟아졌다.
-이놈, 성정을 고쳐라 그리 일렀거늘.
애써 분을 삭이는 아비의 음성에 모대는 가만히 떨었다.
-어찌하여 이리도 깨침이 없느냐.
모대는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몸을 웅크리자니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백 씨의 자제가 아뢰는 말이 틀림없는 사실이렷다?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면 아비의 화를 더욱 돋운다는 것을 모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한즉 모대는 재삼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 아비의 심문에 긍정했다.
-고얀.
곤지는 노기를 말로써 발하는 법이 없었다. 고얀. 아무리 화가 끓어도 그 두 글자로 그쳤다. 다만 그 노기를 벌로써 발하였다. 곤지는 모대의 엎드린 몸을 회초리로 맵게 후려쳤다. 모대는 읍, 읍,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아비의 처벌을 달게 받았다. 모대의 덜 자란 몸을 고루 내리친 그는 질긴 회초리를 집어던지며 선언했다.
-너는 오늘부터 달포 간 왕가의 권속이 아니다. 다만 백 씨의 사환꾼으로서 일하며 네 죗값을 치러라.
-하지만, 아버님!
곤지는 눈을 부라리는 것으로 모대의 반론을 제압했다. 그로부터 달포 간 모대는 백가의 사환꾼으로 살았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백가의 뒤를 따르는 모대를 향해 말대인이 킬킬거렸다.
-슬플 것도, 노할 것도 없어라. 다 크게 쓰일 일이 있겄제요!
모대는 빽 소리를 질렀다.
-말대인은 말이나 돌보아!
-그럼은요, 그럼은요.
말대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구간으로 물러났다.
모대의 시선은 백가의 눈에서 그의 손으로 옮겨갔다. 떨고 있구나. 너의 손도. 너의 눈처럼 떨고 있어. 그래, 너는 겁이 많다. 그럼에도, 그 겁을 견디고서 이렇게 까지. 모대의 눈두덩에 물기가 차올랐다. 이토록 나의 죄가 크단 말이냐.
-내가 너에게 모질었느냐?
모대는 눈을 감고 모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얼굴을 찡그리고 기억의 구석구석을 훑어보지만 결국 모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을 떠 모대는 다시 백가의 눈을 보았다. 거기에 기록된 복잡한 역사에서, 모질었던 것이 끼어있는지 찬찬히 살폈다. 그러나 그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백가가 시선을 돌려버린 까닭이다. 모대는 이미 거두어진 백가의 시선, 그것의 잔상을 슬프게 응시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 백가야. 나는 너에게 모질지 않았거늘…….
모대는 침대에 허망하게 주저앉았다.
-그렇다면 네가 나에게 모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모대는 후회했다. 내가 백가를 책망하였구나. 말없이 떨고만 있는 백가가 모대는 가여웠다.
-무엇이 너를 이렇게…….
대체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너로 하여금 나를 치게 하였느냐. 모대의 언어는 몰아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모대는 그 언어들을 거두었다. 두어라. 그리하여 뭐 하겠느냐. 이미 일이 이리 되었다. 모대는 옆 자리를 가만히 쓸었다.
-오래 서있었다. 앉아라, 잠시라도.
백가는 머뭇거렸다.
-급할 것 없다. 일은 이미 다 이루어졌다.
백가는 주춤거리며 모대의 곁으로 다가갔다. 너의 걸음, 성정대로 진중하고 조심스럽다. 백가는 살포시 침대에 앉았다. 그로부터 익숙한 냄새가 끼쳤다. 전장에서도 조정에서도 궁전에서도 저자에서도 곁을 지키던 그 냄새. 향기라고 하기엔 그처럼 고상하지 않으나 불쾌하지 않고 편안한 그 냄새. 그래, 이것이 익숙한 만큼 너는 내 곁에 오래도록 있었구나. 고맙다. 왕후가 눈을 흘길 정도로, 그만 물러가라 이를 정도로 너는 내 곁에 오래도록 있었다. 오래도록 있으면서, 나에게 향하던 숱한 칼들을 막아주었다. 현혹하는 사탕발림으로부터, 삿된 술수로부터 구하였다. 네가 없이 어찌 내가 있었겠느냐. 네가 나의 첫 스승이었다. 너로부터 내가 변하였다. 그래, 정말로 네가 없이 어찌 내가 있었겠느냐.
-굼벵이탕을 끓여 자셨나. 피가 끓는 시절에 어찌 그리도 굼뜨십니까. 백 씨의 사환으로서 성실히 종사하라는 왕제 전하의 뜻을 거스르실 작정이신지요?
모대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곤두섰다. 누구는 비지땀을 흘리며 짐을 나르는 데 열중이거늘, 누구는 합죽선을 살랑거리며 성실한 역군에게 핀잔을 놓는단 말인가. 저 밉살스런 콧잔등을 주먹으로 짓이겨주어야 화가 가실 것이나 그러자면 아비로부터의 혹형을 피할 길이 없으니 모대는 힘없는 한숨으로 매조졌다. 일꾼으로서는 영 아니올시다그려. 쯔쯔 혀를 갈기며 뇌까리는 백가의 말이 얄미웠다. 허접스러운 목검에 눈빛이 떨리던 하얀 손목의 소년은 어디로 가버리고 영악한 능구렁이가 도사리고 있는지. 달포만 지나보아라. 반드시 네놈 가문을 불구덩이에 처박고야 말 터이다. 물정 모르는 어린 무지렁이의 철없고 웅대한 각오였다.
백가의 모대 다루는 솜씨가 참으로 영악하다는 것이, 항시 조롱조로 몰아붙이는 일변도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한참 모대의 약을 바싹 올려놓고, 이제 한마디만 더 얹으면 모대가 광포히 굴 참이었다. 그러면 백가는 교묘히 웃는 낯으로 휴식을 권하는 것이었다. 공자는 이리 와서 좀 쉬시지요. 슬그머니 주전부리도 챙기면서. 마지못해 곁에 앉으니 이제 선자까지 부친다. 어주, 이놈 봐라. 모대는 실소를 머금었다.
-내가 공자에게 골탕이나 먹이자고 왕제 전하를 뵌 줄 아십니까.
아니요. 모대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백가는 멋대로 자답했다.
-어라하의 신민으로서 왕제 곤지의 위명을 모르는 자 어디 있겠습니까. 정의를 옹호하고 백성을 비호하며 조정에 봉사하고 환란을 제압하는 왕제 전하께서는 진정으로 나라의 빛이십니다. 그런 왕제 전하의 높으신 함자가 상단의 달구지나 급습하는 무뢰한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뭐야?
-왕제 곤지의 소생이라니. 이를 믿어줄까 말까 하다 공자의 관상을 보고 믿기로 했습니다. 심술이 덕지덕지 끼어있긴 해도 귀인의 상이긴 하더이다.
-뚫린 입이라고!
백가는 모대의 항변을 가뿐히 무시하고 제 할 말을 이었다.
-나는 일단 믿기로 하였습니다. 당신이 왕제 곤지의 소생이라고. 그러니 수가 보이더군요. 일단 공자 일당을 방면해주고, 왕제 전하를 뵈어 낱낱이 사정을 고하리라. 그리하면 왕제 전하와 말길을 트게 되는 것이고 이 기회를 잘 살리면 든든한 벗바리를 얻는 수도 생기리라.
-고얀.
모대는 얼굴을 붉혔다.
-공자의 고얀은 춘부장의 것보다는 위엄이 덜하군요.
백가는 부채를 살살 부쳤다.
-노기를 그토록 드러내지 마십시오. 속을 들키면 적은 다음 수를 더 쉽게 꾀합니다. 그러면 더욱 골탕을 먹는 것이지요.
노기를 그토록 드러내지 마십시오. 백가가 모대에게 최초로 일러준 지혜이자 앞으로 숱하게 쏟아질 고언들의 시초였다.
-너를 만나고 많은 일이 있었다.
모대의 눈이 백가의 눈을 보았다.
-그 많은 일들이, 너에게 기꺼웠느냐?
마침내 모대의 눈이 물기를 떨어뜨렸다. 모대는 울면서 백가에게 물었다. 너는, 기꺼웠느냐? 백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대가 다시 물었다.
-너는 기꺼웠느냐?
나는……. 백가가 무거운 입을 뗐다.
-나는, 기꺼웠습니다…….
-오냐 나도 기꺼웠다.
마구간에 매인 가라말이 뛰쳐나왔다. 갈기가 바짝 곤두섰다. 긴 울음을 토해내며 가라말은 난동을 부렸다. 눈은 발갛게 충혈 되었다. 가라말은 한참을 날뛰었다. 목자는 멍한 눈으로 가라말의 난동을 가만 두었다. 그것을 보는 이들의 대개는 말이 미쳐버렸다고 하였지만 목자는 다르게 말하였다. 갸륵하다. 목자는 다시 요통을 견디면서 두엄더미를 쌓았다. 전부 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이다. 슬플 것도, 노할 것도 없다. 본시 그리 되도록 꾸며진 일이다. 목자는 낮게 중얼댔다. 밤안개가 낮게 깔린 마포촌의 일이었다.
2
-주무십니까.
하늬바람을 타고 귓가에 전해오는 목소리에 모대는 눈을 떴다. 모대는 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음에 부정했지만 기실 잠이 들었던 듯도 하였다. 푹신한 동산에 맡긴 몸이 느른하였다. 모대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주무십니까, 살가운 물음이 들려온 방향이었다. 그 물음의 주인을 보고서 모대는 다시 웃었다.
-무엇이 우스우십니까.
오로지 물음으로 말 맺음 하는 그 사람에게로 바투 붙어 껴안았다. 좁다란 어깨가 넓은 품안으로 알맞게 들어왔다. 곱게 짜놓은 명주실 같은 머리칼을 손으로 빗기며 모대는 가만히 정수리에 코를 박았다. 모대 입 주변에서 웃음기가 가실 줄을 몰랐다.
-에이카.
모대는 물음에 대하여 대답 대신 이름을 불렀다.
-부인.
여자는 제 이름을 부르는 것에는 생글 눈웃음을 쳤지만 두 번째 부름에는 마뜩찮은 듯 미간을 좁혔다.
-부인은 안 됩니다. 구다라의 귀한 혈맥은 오로지 그들끼리 통하여 잇는 법입니다.
-이미 너와 나는 통하지 않았느냐?
배시시 웃으며 걸어오는 질문에 에이카는 고개를 휙 돌렸다.
-망측하게……
-또 누가 구다라의 귀한 혈맥이라는 거지?
에이카는 다시 고개를 모대 쪽으로 돌렸다.
-멍청한 질문을 하는 제 앞의 사내가요. 너무나 멍청해서 그 귀한 혈통을 잊어버린 분이죠. 제가 알려드릴게요. 공자께서는 구다라 건길지의 질자이자 존경받는 왕제 곤지 전하의 소생이며……
-저리 치워. 다 무슨 소용이야. 본국에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 변방의 하고 많은 왕족들 중 하나일 뿐이야.
에이카는 저를 안은 모대의 품을 뿌리쳤다. 그녀는 심통이 찬 눈으로 모대를 올려보았다.
-그 말씀은 왕제 전하를 욕보이고 나아가 구다라의 왕통을 능멸하는 거예요.
-누가 보면 에이카는 구다라의 신민인 줄 알겠어.
그녀는 논쟁에서 밀릴 의사가 전혀 없었다.
-누가 보면 공자는 고구려 사람인 줄 알겠어요.
모대는 대강 손을 내젓는 것으로 논쟁을 매조지려고 하였다. 그녀와의 논쟁에서는 항시 이기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기왕 벌어진 판을 접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날선 목소리가 모대의 귓전으로 날아와 따갑게 박혔다.
-공자께서는 공자의 귀한 혈맥에 책임감을 가지셔야 해요. 그 피가 어떤 핀데. 한수에 이르러 십제(十濟)를 창건하신 온조대왕으로부터 내려와, 동정서벌하고 사직을 굳건히 하신 근초고대왕께서 널리 떨치시고 그 후로 누대에 계승되면서도 절대 더럽혀지지 않은 고결하고 존귀한 혈맥이 아니던가요? 그 혈맥을 잇고서도 어떻게 그런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주워섬기실 수가 있단 말예요?
-태학박사보다도 구다라 역사에 훤하구먼. 이래서 여인들이 필요 이상으로 깨우치는 걸 경계해야한다니까.
-말은커녕 방귀 취급도 못해줄 그 말은 필시 말대인의 천박한 혀끝에서 나왔겠죠?
모대는 할 말을 잃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백가의 상단에서 사환꾼 노릇을 하며 얻은 것은, 비단 자주 결리고 쑤시는 어깨뿐만이 아니었다. 에이카라는 여인 역시 사환꾼 노릇을 하는 와중에 얻었다. 그런데 한없이 상냥하고 곰살궂다가도 이따금 크게 몰아치고 벽력처럼 드세지기도 하니 과연 에이카가 자주 결리고 쑤시는 어깨보다 나은 품삯인지는 고민을 해봐야할 문제였다. 에이카가 모대의 여인이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춘정이 한껏 부풀어 오르는 시절의 그들이었으니 어쩌면 그렇게 되도록 지어진 일인지도 몰랐다. 백 씨의 몸종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그녀가 가녀린 정수리에 닷새 치의 빨랫감을 이고 빨래터로 향하고 있었다. 근방에 악명 높은 말썽쟁이여도 여인에게만큼은 호의를 아끼지 않는 모대가 그 장면을 보고 지나치지는 않은 것이었다. 여인에게서 빨랫감을 기어코 받아내는 그 순간에 모대는 소매를 걷어붙인 그녀의 가늘고 흰 손목을 보고 말았다. 더불어 잔뜩 그늘진 그녀의 움푹 팬 쇄골을 보았다. 모대의 눈이 흔들렸다. 이어 미처 여미지 못한 앞섶까지 시선이 이르는 것은 구태여 모대가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자연한 힘에 이끌림이었다. 그러다가 여인의 붉은 뺨을 보고 시선을 마주하니 환한 불빛이 타다닥 튀는 것이었다. 이른바 이신전심이었다. 후텁지근한 여름의 공기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타고 흐르는 훤한 목 줄기며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배시시 웃는 환한 입모양을 가진 모대였다. 그것이 또 여인이 보기에 흠 잡을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서로가 꺼리지 않으니 정이 동하고, 또 그러하니 자연스레 몸을 껴안고 만지고 하는 것이었다. 한창 여물어가는 남녀의 몸이었고 서로가 궁금한 더운 피의 그들이었다. 왜국의 법도란 것이 구다라처럼 내외하고 까다롭고 시시콜콜하게 절차를 따지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맞으면 쉬 동침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풀이 허리춤에만 올라도 사내가 계집을 고꾸라트리는 것이 왜의 통념이었다. 그럼에도 왕래가 잦고 개활한 빨래터에서의 일은 나름대로 파격의 축에 드는 일인 것이었다. 금세 모대 공자와 몸종 에이카의 사연으로 동리가 떠들썩해졌다. 고결한 군자 왕제 곤지는 아들의 뜨악한 추문으로 달구어진 얼굴을 가리느라 회초리를 들 짬이 없었다. 모대가 아비의 체면일랑 안중에 두지 않고 오로지 연애에만 열중하는 것은 말대인 찬수류가 그 시절에는 으레 그러는 것이라며 못된 부추김으로 모대의 허파에 바람을 불어넣은 까닭이었다.
백가가 옛날 중국 이야기를 해준 것은 그들 사이의 정분이 익을 대로 익은 때의 일이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사환꾼 노릇을 하기로 한 기한이 지난 연후에도 모대는 툴툴거리면서도 백가와 곧잘 어울리고는 하였다. 에이카의 주인인 백가와 어울리지 않고서는 그녀를 볼 수도 없는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근묵자흑이라고 모대를 따라 못된 버릇이 든 백가는 아무렇지도 않고 헛간에서 몰래 주안상을 보고 있었다.
-전국칠웅이 겨루던 때에 여불위라는 장사치가 있었다죠.
배울 학 자라면 학을 떼는 모대도 백가의 현하구변이자 청산유수의 언변에는 귀를 기울였다. 턱을 괸 채 심드렁한 체 하여도 시선은 항시 백가의 쉬지 않는 입가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여불위는 저자에서 많고 많은 왕자 중에 하나에 불과한 자초라는 이에게 제 재물을 모두 걸었더란 말입니다. 여기서 기화가거(奇貨可居)란 고사가 나왔지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귀한 재목에 제 모든 걸 건 겁니다. 그런데 그 여불위란 자의 안목이 예사가 아닌 게, 자초가 여자처자 하여 죽은 왕의 뒤를 잇게 되었더랍니다. 물론 여기저기 재물을 찔러주고 혀를 잘 놀린 여불위의 수완도 한몫 했습니다마는. 그 휘에 여불위는 승상에 올라 자초의 뒤에서 국정을 좌지우지 했습니다. 그러다 자초가 얼마 안 가서 죽고 말았는데, 그 뒤를 영정이란 그의 아들이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이 또 기가 막히지요.
-왜?
-여불위가 자초에게 제가 아끼는 어여쁜 몸종을 내주었는데, 자초와 몸종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 바로 영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여불위가 자초에게 몸종을 내줄 적에 이미 몸종은 아이를 배고 있었던 겁니다.
어느새 모대는 턱을 괴었던 팔을 풀었다.
-그렇다면?
-그렇지요. 사실 영정은 여불위와 몸종 사이에서 수태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영정이란 아이가 왕위에 올라 전국을 통일하고 시황제에 등극한 것이지요.
-그것 참!
-결국 여불위는 그 탁월한 안목을 믿고 과감하게 도박을 함으로써 승상에 오른 것은 물론, 제 아들을 천하 최초의 황제로 만든 것입니다.
모대는 입을 헤벌리고 이야기를 곱씹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네.
-이 얘기가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데?
백가는 실실 웃었다.
-그래요?
모대가 한참을 끙끙거리자 백가는 슬며시 은근한 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혹시 자초라는 작자의 인생이 공자의 것처럼 느껴져서 그러시는 거 아닌가요?
모대가 잠깐의 고민으로 그 속내를 알아차리고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을 때에는 이미 백가가 저만치 내뺀 후였다. 낄낄거리며 달아나는 백가의 목소리가 점차로 멀어졌다.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그래도 에이카는 제 애를 배지는 않았으니!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는 모대에게로 찬수류가 다가와 위로랍시고 말을 건넸다.
-빽 공자께서능 여불위 그녘이 워쩌케 뒤져불었는 중은 쏙 빼부는구마이. 그 여 가 놈은 애비도 못 알어보는 시황제으 손에 붙들려 죽고 말제라. 개쥭음도 고런 개쥭음이 없제요, 암만. 자석새끼 손에 쥭는 거맨큼 좆가턴 죽음이 어딨겄습니까?
-아휴, 내가 속이 뒤집혀 죽고 말지. 이 웬수야, 제발 좀 안 보고 살자!
-아니 임자, 요 조불조불헌 왕부에 함꾸네 붙어 사는디 우째 안 보고 배기겄어? 기왕지사 얼굴 맞대고 살거며는 웃으면서 살자고, 웃으면서.
-저리 치워!
항용 그래왔듯 백제왕부의 아침은 유모와 말대인의 옥신각신하는 소리로 열렸다. 오늘은 유독 유모의 언성이 드높은 것이, 말대인의 희롱이 단지 말에 그치지 않고 섣부른 몸짓으로 이어진 까닭이었다. 은근하게 웃으며 유모의 뒤로 가만 다가가서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와락 유모를 껴안은 것이었다. 어제 번화한 홍등가에서 날이 새도록 창녀들과 진하게 몸을 섞은 기억이 남은지라 그토록 유모에게 과감할 수 있었다. 유모의 매운 손이 당장에 말대인의 염소수염을 스무 가닥은 족히 뽑아버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면서도 말대인은 히죽히죽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뜨악한 눈빛을 던지는 것이었다. 유모는 답답한 가슴을 두드리며 거푸 탄식을 뱉었다.
-이녁도 부군 잃고서 독수공방 허면서 얼매나 밤마다 외로웠능가? 나도 상처한 지 올해로 벌써 십 년을 채웠다네 십년을. 서로 외짝끼리 돕고 살잔 말일세. 내 나이 올해로 불혹이 되었지마는 아직 아랫도리에는 심이 넘친다니께? 의원이 은근히 이르기로 이 몸에 양기가 과하여 관 속에 들어갈 때꺼정 쇠하는 일이 없다는구먼! 어뗘, 마음이 동하시는가?
-동하기는, 염병……
-아이이… 그러지 말구……
말끝을 흐리며 유모의 풍만한 젖통을 탐하는 손길을 뻗치던 말대인이 슬그머니 다시 제 무릎으로 손을 갖다놓은 것은 등 뒤에 뻗치는 기운을 감지하고서였다. 말대인이 헛기침을 험험 뱉으며 뒤를 돌아보니 역시 생각한 대로였다. 에이카가 허리에 손을 얹고 말대인의 뒤통수를 도사리고 있던 참이었다.
-거참, 매양 하던 것인디 멀 그리 죽을 듯이 보고 그랴……
슬쩍 자리를 피하려는 말대인의 손목을 에이카가 낚아챘다.
-어딜 내빼요?
-내빼기능 누가……
모대는 대청에 드러누워 시종 씩씩했던 말대인이 에이카의 앞에서는 한없이 쪼그라드는 풍경을 관조하는 것을 취미로 하였다. 그날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곧 진저리를 치던 유모가 에이카와 공동전선을 형성할 것이고, 이제 말대인은 두 여인에게서 호되게 쏟아지는 꾸지람을 온몸으로 받다가 종내 지쳐버려 도망치듯 구사로 향할 것이었다. 그것은 소싸움에서 꽁무니를 빼는 우람한 황소를 보는 것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구경거리였다. 이제 막 유모가 달려들려고 하는 참이었다. 모대는 허리를 비스듬히 세워 알맞은 시야를 확보했다. 그런데 이 다음 장면은 모대가 그리던 것이 아니었다. 대문이 벌컥 열리더니, 집사 노인이 좋지 않은 관절을 삐거덕거리면서 부리나케 왕제 곤지가 있는 집무실로 향하였다. 왜왕이 거둥한다는 기별도 느릿한 갈지자걸음으로 아뢰던 이가 아니었던가. 이례적인 황급함에 모두의 눈길이 곤지의 집무실로 쏠렸다. 모대도 수상쩍은 낌새를 느끼고 대청마루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어 경내의 모든 일가붙이며 권속들이 소환되었다.
-바둑 두는 법을 더 연마해야겠군, 진남.
진남이 불계패를 선언하자 경사는 제가 두었던 상아 백돌을 도로 수습하였다. 경사의 말에는 자못 의기양양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임금의 가벼운 질책에 진남은 물러나 절을 올렸다. 하얀 수염이 바닥에 닿았다.
-신이 부단히 연마한들 어찌 어라하의 대단한 기량에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판을 이만큼 끌어온 것도 어라하께오서 자비심을 베푸신 탓인 줄 아옵니다.
-저런, 늙은이의 둔한 감에도 들켜버리다니. 짐의 연기가 퍽 어설펐단 소리렷다.
-황송하옵니다.
경사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만 물러가라는 임금의 뜻이었다. 진남은 다시 절을 올리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경사는 시녀가 그득히 따라 올린 독주를 단숨에 넘기며 명하였다. 진남이 들으라는 듯 쩌렁쩌렁한 음성이었다.
-왕사 도림을 들라하라! 역시 짐의 맞수는 오로지 왕사만이 가함이다. 이름 세 좀 떨치던 진남도 늙어 더 쓰지 못하겠구나.
어전에서 물러나는 진남의 입 주위가 꿈틀거렸다. 하얀 수염이 덩달아 비틀렸다.
도림이란 승려가 왕사(王師)에 오른 것은 불과 열흘 전의 일이었다.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벌이 두려워 국경을 넘었다고 하였다. 남당(南堂, 백제의 조정)의 중론은 고구려의 간자가 분명하니 국문을 하고 처단하자는 것이었다. 경사도 그럴 참이었다. 도림의 말을 믿어주기에는 그 수법이 고루했다. 그러나 도림이 바둑을 입에 올리자 경사의 눈이 뒤집혔다.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바둑의 명수들도 경사의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경사는 임금이요 나라의 으뜸가는 기객(棋客)이었다. 더불어 그만한 실력을 가질 만한 바둑광이었다. 목을 베는 것은 화급한 일이 아니니 바둑이나 한 수 둬보자며 경사는 도림을 마주하고 앉았다. 중천에 걸려있던 태양이 노을을 뿌리며 서산마루로 서서히 저물 적까지 둘은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점차로 경사의 수가 느려졌다. 장고하니 악수는 필연이었다.
-네 솜씨가 쓸 만하다.
그것은 사면령이었다. 사면에 더하여 경사는 도림을 귀히 여기기 시작했다. 조반을 들고 곧장 도림을 대령케 하여 대국을 하더니 이러저러하게 아뢰는 상소들의 더미를 뒤로 하고 오로지 도림과의 대국에만 힘을 쏟았다. 남당에서는 통촉하시라 종일 우는 소리를 하였지만 어심은 동하지 않았다. 진남이 어전에 나아가 늙은 몸을 바닥에 깔고 도림을 베고 국사에 전념하시라 간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근왕병의 매서운 몽둥이찜질이었다. 남당의 원로이자 귀족의 으뜸인 체면에 눈물이 아니 배어나올 수 없었다. 경사가 기꺼워하는 태자 문주의 아룀도 겨우 벌을 면하였을 뿐이었다.
도림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이제껏 경사가 칭찬하면 송구하나이다 한마디로 그치던 이였다. 궁전이 심히 좁습니다. 도림이 슬그머니 운을 뗐다.
-좁다?
경사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도림은 바닥에 엎드렸다.
-신이 불경스런 말을…… 송구하나이다.
-새로이 중수한 궁전이다. 그럼에도 좁더냐?
-어찌 미천한 분수로 어라하의 궁전을 논하겠습니까. 부디 신의 불경을 용서하여주십시오.
-네놈은 고구려의 종자라 하였다.
-그러하나이다.
-그러하다면 네놈의 분수에 궁전이라고는 보아야 거련〔長壽王〕이가 엉덩이를 비비고 있는 평양성이 고작이었을 터. 위례성이 평양보다 못하더냐?
-죽여주십시오.
-임금의 물음에 답하지 아니하는 것이야말로 목을 벨 일이다.
도림은 마지못해 엎드린 채로 아뢰었다. 그의 전언은 경사의 피를 들끓게 하기에 족하였다. 평양에 비하자면 어라하의 위례성은 궁벽한 시골의 관아에 오히려 가깝습니다. 임금의 힘은 높다랗게 솟은 궁전의 누각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니 뭇 신료들이 어라하의 일 하나하나에 시시콜콜하게 간섭함이 전연 이상한 일이 아니옵니다. 왕도의 성벽을 굳게 다지고 궁전의 누각을 높이며 보좌를 황금으로 치장하면 그들이 자연히 어라하의 성위에 굴복할 것인즉, 신의 사사로운 소견일지언정 부디 뿌리치지 마시오소서. 경사는 얼마 전 어전에서 생떼를 쓰던 진남을 떠올렸다. 경의 말이 지극히 옳다. 이 진언으로 도림은 왕사의 자리를 얻었고 경사는 나라의 물산을 오로지 왕사의 뜻대로 운용하였다. 남당은 천대를 받았고 국사는 경사와 도림의 바둑판 위에서 이루어졌다.
-어라하가 국사를 외면하고 남당을 능멸함이 도가 지나치는구나.
진남은 어전에서 물러나 찬바람이 부는 남당을 두고 그대로 귀가하였다. 그의 말을 듣는 이는 진남의 뒤를 이어 진씨 가문의 가주가 될 재목이자 내로라하는 귀족 자제들 중에서도 촉망받는 기린아인 진남이었다. 화를 누그러뜨리시라 내민 찻잔에 진남은 분개하는 와중에도 갸륵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는 무심코 팔을 주무르다가 곳곳에 번진 피멍을 건드리고 이를 악물어 고통을 삭였다.
-분하다. 분하다, 로야.
곰나루
해구는 싯누런 이를 드러내며 비식비식 웃었다. 진남은 저 치의 입으로 들어가는 찻물도 아까웠다.
-대인께선 어라하께 사정을 잘 말씀을 드려주십시오. 보다시피 벽지에 땅이 기름지지도 않을뿐더러……
-허어, 어찌 이리도 둔해지셨소. 아니면 어라하를 향한 충정이 늙는 몸을 따라 쇠한 것이오.
-그것이 아니오라……
-도림이 선왕의 얘기를 꺼내더이다.
시종 웃음기를 잃지 않던 진남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선왕은 진씨에 있어 가장 아픈 구석이었다. 그 고구려 땡추가 기어이 그 일까지 운운하고 다니는가. 경사의 반응은 보지 않아도 빤했다. 땡감을 베어 문 듯한 기색에 해구는 뱃가죽을 들썩이며 걸걸하게 웃었다.
-지금껏 선왕의 능을 조성하지 못했잖소. 임금의 위엄을 세우려면 성대하게 왕릉을 세우시라 하더군. 뭐, 영 틀린 말은 아니잖소.
해구는 그것으로 말을 맺고 한성으로 돌아갔다. 진남은 낯을 흐린 채로 그를 전송하였다. 해구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 없는 욕지거리를 퍼부어주었다. 지금껏 선왕 운운하는 소리가 안 나오도록 그 모진 세월을 묵묵히 견디었거늘. 진남은 해구와 더불어 도림이 괘씸했다. 날이 밝자 한 떼의 달구지들이 경기의 진씨 본가에서 한성의 북문으로 향했다. 이어서 무성의한 어지(御旨)가 그 반대 방향으로 갔다. 수고하였다. 진남은 어라하의 사자가 돌아가자마자 어라하의 성지를 호롱에 불살랐다.
진씨를 비롯하여 숱한 귀족들이 한성으로 부단하게 물자들을 실어 날랐다. 들보를 세울 목재들이며 성좌와 왕릉을 꾸밀 보화들이며 기와와 막새, 벽돌, 역부들을 먹일 쌀과 푸성귀, 더불어 왕실에 대한 충성을 입증하여 눈치껏 헌납하는 비단과 황금 등속. 백씨는 대대로 내려오는 명궁을 왕도에 바쳤고, 연씨는 영롱한 빛의 담가라말을 진상하였다. 해씨는 가문의 세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거대한 황금대불을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진상하였다. 진씨도 울며 겨자 먹기로 누대의 가보인 야명주를 바쳤다. 복속한 지 오래건만 여전히 반골의 기상이 팽배한 옛 마한의 땅에서 역부들이 징집되어 왕도로 향했고, 조세의 짐이 무거워졌다. 민심이 탁해졌고 관아의 곳간은 비었다. 왕도로 온 나라의 물자들이 집결하였다. 이를 출세할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긴 약삭빠른 변방의 외관들은 관군의 창칼을 녹여 선왕의 넋을 기리는 절간의 당간지주
- 2014/09/2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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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본성이 있다.
몇 날 며칠을 주린 사람에게는 금은보화보다도 당장의 쌀밥이 귀물이다.
이처럼, 나 또한 나에게 없는 것을 바라 왔다. 나는 지금 병역의 의무에 매인 몸이다. 공군기지의 가장 높은 곳인 7층의 관제탑이 나의 근무지다. 관제탑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틀면 동해의 푸른 수평선이고, 오른쪽으로는 흰 풍력발전기가 성기게 박혀있는 높다란 대관령이다. 나는 철조망 바깥의 그것들을 바라보며 6주마다 돌아오는 외박의 때가 도래하기를 한숨을 푹푹 쉬면서 고대하는 것이다. 이러하듯 나에게 가장 결핍되어 있는 것은 운신의 자유. 그러므로 내가 가장 목말라하는 것은 남의 간섭이 배제된 오로지 내 스스로 꾸려내는 모종의 사업이다. 남의 훈수와 오지랖이 없이, 손해를 보더라도 스스로 결정하여 나아감을 바라는 것이다. 그 사업들 중, 20대의 나에게 가장 와닿는 것은 여행이었다. 남들은 철마다 가는 해외여행 한번 해보지 못한 나였으므로 그것은 병역의 의무를 지기 이전에도 항상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 반년이나 더 이곳에 묶여있어야 하는 신세로서 당장 훌쩍 떠날 수단이 없는 까닭으로, 나는 언젠가의 여행을 꿈꾸며 텔레비전으로나마, 인터넷으로나마 간접적인 체험을 하고 계획을 짜보았다.
여러 지역들이 물망에 올랐다. 이미 페이스북 친구들의 배경으로 내 시야에 뻔질나게 드나들던 에펠탑과 가우디의 걸작들은 내 흥미를 동하게 하기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들이었다. 더불어 인기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여행지가 되었던 지역들도 그러했다. 전인미답의 오지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지만(그럴 배짱도 없거니와) 적당한 생경함은 원했다. 오로지 나의 손으로 경비를 벌어내야 하는 점에서 지나치게 경비가 많이 소요되는 지역도 배제되어야했고, 보신주의자인 내 성정에 의하여 치안이 과히 좋지 못한 곳 또한 탈락했다. 초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일자무식 예비여행자의 까다로운 필터링을 거친 여행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모로코와 이란, 그리고 쿠바였다.
그 세 곳 중에서 왜 굳이 쿠바를 골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아무 말 없이 어깨만 으쓱거리겠다. 잘 모르겠다.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에 경도된 사회주의 좌파인 탓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하겠다. 카리브해의 푸른 낭만을 염두에 둔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라고 하겠다. 남미의 화끈한 햇볕의 탓도, 유쾌하고 강렬한 춤사위의 탓도 아니라고 하겠다. 그곳의 로컬푸드의 탓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역시 아니라고 하겠다. 내가 찾아본 바에 의하면, 식문화를 즐기기 위한 여행지 리스트에서 쿠바는 맨 마지막에 있어야 마땅하다. 곰곰히 따져보니 굳이 쿠바를 택한 까닭을 꼽자면 쿠바의 색과 올드카의 탓이라고 하겠다. 다소 싱겁다면 싱겁다. 건물의 알록달록한 색깔과 영화에서나 보던 그야말로 올드-카의 모습에 나는 관심이 갔던 것이다. 평소 미술에 관하여는 문외한인데다가 드림카가 기아의 쏘울일 정도로 자동차와는 인연이 박한 나인데 왜 그것에 관심이 쏠렸는지는 나도 정말 모르겠다. 어쨌든 쿠바는 모로코와 이란을 꺾고 내 첫 번째 해외여행의 목적지가 되었다. 내 일기장은 이 결심이 2014년 7월 23일의 일이라고 일러준다.
쿠바를 알아볼 수단은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전부였다. 공중파의 여행 관련 교양프로그램과 블로거들의 그리 많지 않은 쿠바 여행 후기를 찾아보았다. 며칠 간 세네 시간은 훌쩍 지날 정도로 쿠바에 흠뻑 빠졌다. 점심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입을 헤 벌린 채로 스크롤을 거푸 내리다가 관제탑 야간근무 상번하기를 예사로 했던 날들이었다. 사실 내용 중에 별 게 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실망을 했어야 당연할 내용들이 많았다. 아바나의 순수는 애저녁에 증발해버렸고, 지금은 오로지 굶주림을 면하기 위하여 여행자의 자비심을 구걸하는 자들 뿐이라는 내용이 굉장히 많았다. 굶주림이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는 탓으로 그 구걸의 손길은 때 묻지 않아야 마땅할 어린 아이의 것도 있다는 말에 가슴이 저렸다. 더불어 쿠바에는 경이를 자아낼 만한 유려하고 웅장한 유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공산품이 없어 오로지 재료 본연의 맛에만 충실해야 하는 쿠바의 음식은 짭짤하고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내 관점에서는 영 아니올시다였다. 그것들을 보고도 나는 연신 쿠바의 이름을 외웠다. 별 일도 다 있지.
오늘, 2014년 9월 21일, 나의 결심은 유효하다.
이토록 무언가에 정신을 쏟은 것은 일곱 살의 공룡 이후로는 처음이다. 그만큼 뜨겁다. 이 결심이 실천으로 옮겨갈지는 장담할 수 없다. 내가 상상 이상의 의지박약이라는 것을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탓이며 또한 변수가 많은 탓이다. 내가 동반자로 내정한 K군이 정말 갈 의지가 있는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고, 돌발한 사건으로 착실히 모아가던 경비가 단번에 날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스코어, 일단은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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